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bystep Jun 21. 2020

금배지를 달았어

첨 꺼내보는 옛날 이야기

정말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었던, 단 한 번도 소원해 본 적도 없었던 간호사가 되었다.   


시골 깡촌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다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대학 입학시험을 치렀다. 그런 내가 지방 도시에 있는 사립 대학교에 덜컥 합격되자 아빠는 학비가 비싸단 이유로 집에서 한 두어 시간 떨어진  조그만 도시에 있는 기숙사 딸린 간호 전문 대학교 가기를 권하셨다. 몸이 약해 병원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던 내가 누구를 간호한다는 말이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라고 항변하며 그냥 붙은 대학교 가고 싶다고 첨으로 아빠께 심하게 대들었다. 


나를 계속 설득하시다가 결국은 아무 말씀도 않고 멀뚱히 애꿎은 장롱 모서리만 바라보던 아빠와 세상 물정 모르는 내가 보아도 얇디얇은 아빠의 현금 월급봉투 속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줄곧 만지작 거리며 한숨짓는 엄마의 옆모습을 보며 순식간에 난 좌절감을 느꼈다. 그런 표정들은 언니가 몇 년 전 학비에 맞춰 대학을 갈 때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빠의 첫마디에 난 마음 정리를  서둘러하기 시작했다.  이미 포기도 했었지만 대학 등록금을 또 빚을 져서라도 납부해야 하나 말아야 갈등하며  마지막 날까지 안절부절못하며 그렇게 좋아하던 약주 조차 끊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던  아빠에게 난 복수라도 하듯이 포기한 내 속 마음을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등록 마감 날과 그 시간이 넘어가 버리자, 그냥 빚을 내서라도 보냈어야지 툭 한 소리 하고선 내가 생각하기에 별로 있지도 않았던 복 다 나간다고 그렇게 경악하며 우리에게 절대 못 앉게 했던  문지방에 엄마는 그렇게 하념 없이 걸터앉아 있었다.  아빠는 또 버릇처럼 이마와 머리카락을 줄 곧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그냥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셨다.  난 아빠가 한쪽 다리만 살포시 덮고 있던 반대쪽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 처음이자 마지막 같은 억울한 울음을 엉엉 터트리고 말았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러면 간호전문대는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한 마디 하시고선 쓰라린 찬 바람이 불던 바깥으로 걸치고 있던 얇은 잠바를 그대로 입고 나가 버리셨다. 


그 이후 난 아빠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나를 만날 때마다 습관처럼 아빠는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셨다. 심지어  내가 한국을 갈 때마다 또는 아빠의 몇 번 되지 않았던 미국 방문 때도 매일 하루에 한 번씩은 고해성사처럼  내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셨다.  



하지만 난 아직까지 아빠께 고백하지 못한 게 있다. 

그때 아빠가 “그러면 간호 전문대는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한 마디를 하고 나가신 후 난 이불속에서 울음을 멈추고 입을 꼭 틀어막은 채 승리의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뭔지도 어떻게 인지도  모르면서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사람이 크게 되려면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한다고 잠깐 이마나 생각했다. 시골이었지만 공부를 정말 잘했었던 친한 친구들 몇몇이 서울에 있는 대학 합격 통지를 들고 자랑하던 모습들을 떠 올렸다. 전철이란 이름의 서울에만 있다는 동네 기차(?) 탄 얘기며 중소 도시나 시골에서는 절대 볼 수 없다는 높은 빌딩 숲들 얘기며  길을 가다가  코 베어 가도 모를 만큼 자동차와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그들의 얘기는 나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고,  아무 흥미 없는 척하며 듣고 있었지만  난 이미 그 희한한 서울에 대한 상상으로 머릿속이 핑핑 돌고 있었다.  아빠의 네 마음대로 해라는 답 한마디를 얻어 내기 위해 부모님의 위축된 가슴을 더욱 후벼 파면서 까지 난 화난 척 되지도 않는 연기를 그렇게 하고 있었던 거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었는지 몰라도 그 해 유독 서울에 있던 모든 간호 전문대학들의 입학 경쟁률이 웬만한 우수 

4년제 대학들보다 치열해졌고 어떤 학교들은 합격 커트라인마저도 오히려 더 높아져 있었다. 고등학교 내내 

잔 병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느라 내신도 별로고 지금 같은 대입 수능성적도 별로 였던  나에게 담임 선생님조차도 서울에 있는 대학 입학은 합격 보담은  떨어질 확률이 70-80%라고 하시며 아빠가 권하시던 지방 대학들만

권하셨다. 떨어지면 재수를 할 것이고,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차라리 시골에 눌러앉아 농사를 짓겠다고 큰소리치며 나는 20-30% 합격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도박하듯 입학 원서 접수를 강행하려 또 한 바탕 난리를 쳤다. 


네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은 네가 져야지 하던 부모님의 말씀을 들먹이며, 아빠는 아빠가 내게 약속 한 말씀에 책임을 져서 어른으로써 모범을 보이시면 되는 거라고 해댔고, 난 합격이던 불합격이던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 이후의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책임을 질 거라는 지금 생각해 보면 책임지지도 못할 소리들을 내뱉으며 일관되게 고집을 피웠다. 지금까지 그저 말 잘 듣고 착하기만 했던 선생님의 학생이,  딱 칭찬받을 만큼만 공부하고 문제 일으키지 않고 그냥 조용히 지내던 어중간한 모범생에다 순하기만 했던 딸이 또박또박 대들며 처음으로 일으키는 도발에 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방 사립 대학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았던 서울의 생활비를 생각하지 못했던 나의 짧은 생각은 이미 고집과 용기로 변해 기어코 그래라는 대답을 얻어 내고야 말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 본 적도 연고지나 친척 한 명도 없었던 서울. 그런 서울에 있는 대학교 학교 홍보지들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멋진 사진들로 도배된 학교 홍보지들을 훑어보다 학교 전체가 벚꽃으로 가득 덮인 만화책에나 나올법한 한 예쁜 캠퍼스에 정신이 팔렸다. 길거리 달고나 뽑기 하듯 손으로 찜하자,  선생님께서는 바로 고개를 흔드셨고 엄청 세어진 경쟁률 때문에 내 성적으로는 그 대학 합격률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셨다. 난 그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에 다시 한번 확고한 의사 표시로 도박하듯 주사위를 던졌고 그 결과  아슬아슬하게 겨우 턱걸이하며 합격하는 대단한 행운을 얻게 되었다. 



남들이 쉽게 간다는 대학들. 우수한 4년제 도 아닌 서울의 3년제 간호 전문대를 간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모르는 이들은 말하겠지만, 시골 깡촌에서 바글거리는 오 형제들을 교육의 힘을 믿고 자신들이 못 이룬 학업에 대한 미련을 우리에게만은 당신들의 피와 땀으로 모든 걸 다 쏟아부어 주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가난을 벗어 날 수 없었던 가난하기만 했던 부모님을 생각하면 난 그저 가슴에 금배지를 단 듯 자랑스럽기만 했었다.  


내 가슴에 내가 선사한 이 금배지에는 세상 어느 것에도 없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일어나서 그 어두운 새벽의 정적을 깨며 그렇다 할 희망도 없이 뚜벅뚜벅 매일 같은 길을 걸어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깊은 갱속으로 들어가서 오직 자식들만 위해 자신의  젊디 젊은 청춘을 다 바친 아빠의 삶이 들어 있었고, 밤새 닦고 말리고 다듬은 고추들을 봇짐으로 싼 후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그것들을 머리에 인 채 여기저기 시골 버스에 몸을 싣고 3일장 5일장을 돌며 봇짐장사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곱디곱던 엄마의 수 십 년 고된 노동으로 휘어진 목뼈와 더불어 그토록 아프고 고달프고 외로웠던 평생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었고 한 번도 소원한 적이 없었던 간호 대학을 난 그렇게 가게 되었다.  한때는 한국의 간호사였고 이젠 평생을 미국의 간호사로 살아오고 있는 이제  나는 내가 스스로에게 선사했던 내 가슴속의 이 귀하디 귀한 금배지를 빼서, 굽어진 목뼈와 거칠어진 손마디를 한 나의 엄마 아빠 가슴에 달아 드리려고 한다. 나 때문에 잃어버렸을 그들의 청춘을 절대 돌려 드릴수는 없겠지만, 아픈 손가락이기만 했던  딸이 내민 자랑스러운 금배지를 달고 더 이상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고 이렇게 말해 주셨으면 좋겠다. “우리 인생 참 잘 살았구나!"

*** 사랑하는 나의 아빠는 하늘나라에서 내가 내민 소중한 금배지를 가슴에 달고선 손을 흔들어 주셨다 ***

작가의 이전글 노란 밥의 정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