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지 않아도 괜찮은데, 한번 해볼까
누가 그러더라구요. 인지성 치매를 예방하는데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좋다구. 혈관성 치매야 어쩔 수 없지만 인지성 치매는 어쩌면 미리 예방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를 거라는 막연하게 긍정적인 자기 주문 같은… 뭐 그런 기분으로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요사이 자꾸 깜박 잊어버리는 것이 많아지는 것 같은데, 한번 외국어 공부를 해 볼까.
어떤 언어가 좋을까. 영어를 좀 더 열심히 해볼까 아니면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 모를 제2외국어를 해볼까.
도서관에서 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나의 토익만점수기'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오호, 어떤 식으로 공부를 했길래 토익을 만점을 받았을까. 영어를 공부하기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어를 공부하는 방법이야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괜찮은 공부방법이 있다면 흉내 내면 되겠지.
글쎄, 나 같은 생각으로 이 책을 골랐다면 ‘으으읔, 실수다’라는 푸념이 나오겠지만, 수기의 내용(소설일 것으로 짐작됨)이 아주 재미가 있어서 ‘목적’은 깜박 잊어버리고 책 읽기에 빠져 버렸다.(이렇게 또 깜박하다니, 분하다)
요사이도 토익점수가 취업에 중요한 지는 잘 모르겠다. 토익고득점이 곧 원활한 의사소통을 보장하는 척도라고 하기엔, 우리나라 수험생의 ‘정답 골라내기 신공’이 경지에 오른지라. 물론 일반화는 금물이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현지에서 히피들과 대마초까지 재배해 가며 고군분투한 후에 ‘만점’을 받았다면, 인정해 줘야겠지.
이 정도로 외국어를 열심히 할 자신은 물론 없다. 뭐 꼭 그래야 할 절박한 이유도 없다. 57세의 나이(한국식이다. 난 수정이 된 순간부터 생명으로 인정하는 우리의 방식이 좋았다. 외국인들에게도 자랑스럽게 우리의 나이계산 방식을 설명해 주곤 했는데. 이번 정부는 쓸데없는 일에 열심이다.)에 새로 시작해도 될까 싶기도 하지만, 하다 안되면 말면 되지. 시험에서 해방된 후에 하는 공부야말로 진짜 공부지(이것은 자기 위안이다)
중국어와 일본어는 괜히 싫다. 로맨틱한 프랑스어가 멋지게 들리긴 할 건데, 그놈의 비강을 이용하여 소리를 만들어 낼 자신이 없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 소리의 색깔 혹은 파동을 구별하기가 점점 힘들어져서 ‘듣기‘훈련에 문제가 생길 테고, 제대로 못 들었는데 어떻게 말을 뱉어낼 수 있을까. 바로 포기.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가 그나마 배움의 가능성이 있는 언어가 아닐까. 아무래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많으니, 잘 만 배워두면 더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완전하게 습득하지 않으면 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외국어를 배우느라 스트레스만 엄청 늘어날테니 말이다.
그렇더라도 목적이 외국어 정복이 아니라 외국어 공부를 통한 인지성 치매예방이라고 한다면 실력이 늘지 않아도 괜찮지. 그래도 기왕에 시작한다면, 이런 이유보다 좀 더 근사한 이유를 찾아서 외국어공부를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예를 들면 이런 거.
죽기 전에 스페인의 산티아고길 순례를 하기로 하고, 이것을 위하여 스페인어를 배운다.
스페인 여행 중 눈이 까맣고 맑은 스페인 여성을 만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낸다.(내가 꼭 이렇게 한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이제는 Wet dream을 꾸는 꿈조차 기대하지 못하는 나이임을 잊지 마세요)
스페인 시골에 처박혀서 하몽 먹고, 와인 마시고, 산책하고 동네사람들과 수다를 떨면서 한 달 살아본다.
하루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웨이터와 음식에 대하여 심각한 대화를 나눈다. 웨이터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메뉴판에도 없는 주방장 특별요리를 권한다. 이게 뭔지 모르지만 인생최고의 요리를 만난다.
아, 또 뭐가 있을까.
아래 그림은 몬테풀차노에서 바라본 주변풍경입니다. 몬테풀차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와인으로 유명한 마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