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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Apr 18. 2024

선뜩하게 날을 세운 세 여인의 우아한 치정극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리뷰, 해석 / 요르고스 란티모스


주요 내용

-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영화 소개

-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입문작으로 추천하는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 아쉬웠던 점. 일부 왜곡된 역사

- 소란스러운 앤 여왕의 인생에 등장한 지저분한 하녀 아비게일, 그녀의 욕망

- 모든 걸 건 두 여인의 치정극. 두 여인이 벌인 사격 경기의 의미

- 복잡한 궁의 복도가 의미하는 것 / 앤 여왕과 사라, 아비게일의 관계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The Favourite, 2018)

선뜩하게 날을 세운 세 여인의 우아한 치정극


개봉일 : 2019.02.21.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전기, 역사, 드라마

러닝타임 : 119분

감독 : 요르고스 란티모스

출연 : 엠마 스톤, 레이첼 바이스, 올리비아 콜먼, 니콜라스 홀트, 조 알윈, 마크 게이티스

개인적인 평점 : 4.5 / 5

쿠키 영상 : 없음



<더 랍스터>, <킬링 디어>, <송곳니>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영화 <가여운 것들>까지. 독특한 연출 스타일로 호불호가 갈리는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제75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작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하 편의상 <더 페이버릿>으로 표기)


<더 페이버릿>은 18세기 초,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앤 여왕의 재임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앤 여왕을 사이에 두고 애정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두 여인 사라 처칠, 아비게일이 만들어가는 치정극이자 암투극이다.

아주 고요한 움직임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여왕의 마음을 툭툭 건드리며 국정의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두 여인과 그 위에 올라타 있는 한 여인이 만드는 팽팽한 긴장감이 압권이다. 이들의 삼각 구도는 빈틈없이 완벽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난 일단 그렇다고 답한다.그의 영화를 볼 때 불쾌한 느낌이 드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나는 그 불쾌함과 기괴함 속에 묻혀있는 지적인 자극과 우아함을 발굴해 내는 과정이 좋다.

하지만 이 즐거움보다 “이 영화 지금 뭐 하는 거야?” 싶은 불쾌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를 추천하고 싶진 않다만..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서 손을 털기 전에 마지막으로 <더 페이버릿>에 한번 도전해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작품에 입문해 보려는 사람에게도 이 영화를 추천한다.



<더 페이버릿>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친절하고 직관적이며 불쾌한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 편에 속한다. 이야기를 파헤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왕궁에 가득 찬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장식들, 주연을 맡은 배우 올리비아 콜먼, 레이첼 바이스, 엠마 스톤의 완벽하다 못해 살벌하게 느껴지는 연기, 시대적 배경에 맞는 독특한 분장을 한 니콜라스 홀트, 조 알윈 배우의 모습 등 재밌는 볼거리도 많다.


아쉬운 점이라면 일부 왜곡된 부분이 있다는 정도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앤 여왕, 사라 처칠 공작 부인, 아비게일 힐 모두 실존 인물이며 배경 또한 가상의 국가가 아닌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다. 그래서 <더 페이버릿>을 역사, 실화 기반의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록된 역사와 영화의 각본엔 다른 점이 있다.

앤 여왕과 사라, 아비게일의 성적인 교류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으며 의구심을 가질 만한 증거 또한 없다. 역사 고증, 왜곡에 있어서 예민한 시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쉽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난 이에 대해선 아무 생각 없이 봤다...)



소란스러운 앤 여왕의 인생에 등장한 지저분한 하녀 아비게일, 그녀의 욕망


영화의 배경이 된 당시 사회에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대한 두개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각을 이루고 있었다. 여왕의 애인인 사라를 중심으로 한 휘그당은 토지세 등 세금을 올려서라도 전쟁의 승기를 확실히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토리당은 국민들의 피를 뽑는 행위를 멈추고 화교를 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 모두 지쳐있던 앤 여왕은 귀족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왕의 옆에 자리한 사라는 가장 가까운 심복이자 애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국정에 깊이 관여하며 전쟁을 계속하는 쪽으로 여왕을 유도한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있던 때, 사라의 먼 친척인 아비게일이 지저분한 몰골로 궁에 나타난다. 귀족 가문이었던 아비게일의 집안은 아버지의 빚으로 완전히 무너졌고 아비게일은 빚을 갚기 위해 여기저기 팔려 다니다 궁으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온갖 더러운 일과 진짜 똥밭에 엎어지는 일까지 겪고 사라의 눈앞에 선 아비게일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사라는 아비게일을 하녀로 들이고 아비게일은 그마저도 감사하며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다.



하지만 있는 사람이, 누려본 사람이 더한다고.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이미 무언가를 누리며 살아본 아비게일이 찬물 싸대기를 맞으며 살아가는 하녀의 삶에 진심으로 만족할 리가 없다. 그것도 여왕과 사라 사이의 틈을 발견했는데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비게일은 공격적으로 그 틈에 뛰어들고 공허함을 느끼고 있던 여왕은 아비게일을 받아들인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모든 걸 건 두 여인의 치정극. 두 여인이 벌인 사격 경기의 의미


많은 것을 가졌으나 공허함을 느끼는 앤 여왕, 더 많은 권력과 사랑을 쟁취하려는 사라, 궁지에 몰린 채 마지막 배팅을 시작한 아비게일. 각자 다른 위치에서 살아온 세 사람이 펼치는 치정극은 우아하고 치열하다.

이들의 싸움은 먼저 가는 이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시끄럽고 처절한 진흙탕 싸움이 아닌, 차례대로 한발씩 주고받는 사격 경기 같다. 그런데 관중이 하나도 없는 아주 비밀스러운 그런 경기다.


사라와 아비게일, 두 사람은 이 승부에 모든 걸 걸었으니 더 이상 잃을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상태다. 사라는 남편이 전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지속하길 주장하며 만약 남편이 전사하면 어떡하냐는 아비게일의 물음에 “모든 일엔 대가가 있어. 난 그걸 치를 준비가 돼 있고.”라고 답하며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아비게일은 말 그대로 모든 걸 잃은 사람이다. 아비게일의 집안은 몰락했고 그녀는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여기저기 팔려 다니며 성적 착취까지 당했다고 말한다. 아비게일은 대령이 예고 없이 방에 들어왔을 때 자신이 겁탈 당할 것이라 생각하며 온몸의 힘을 풀고 침대에 늘어져 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아비게일은 자신의 처지에 체념한 듯 행동하다가 여왕과 사라의 비밀을 엿보게 되고, 둘 사이의 틈이 있다는 걸 눈치채자 적극적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 나선다. 어차피 실패해도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마지막으로 배팅해 보는 거다.



아비게일이 궁에 적응해갈 때쯤 사라와 아비게일은 사격 게임을 벌인다. 처음엔 당연히 사라가 압도적으로 앞서간다. 하지만 금세 감을 잡은 아비게일이 사라의 스코어를 따라잡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사라를 이긴다. 여왕과의 관계도 그렇다.

아비게일이 궁에 오기 훨씬 전부터 여왕과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를 유지해온 사라는 아비게일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 그녀는 아비게일을 도발하기 위해 둘만 아는 농담을 하고 더욱 강하게 여왕을 휘어잡는다.

아비게일은 사라가 여왕에게 주지 못하는 섬세한 관심과 공감을 무기 삼아 여왕에게 접근한다. 사라는 싫어하는 토끼들을 사랑스럽게 쓰다듬고 여왕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그리고 자해를 하면서 자신이 사라보다 약체임을, 보호가 필요한 존재임을 어필한다. 아비게일의 몇 가지 계략이 제대로 먹혀들고 여왕의 옆자리는 아비게일이 쟁취한다.



복잡한 복도를 거니는 여인들과 복도의 주인인 앤 여왕


앤 여왕이 살고 있는 궁은 상당히 크고 일부 복도는 어둡고 복잡하다. 사라와 아비게일은 여왕의 방으로 향하기 위해서 또는 여왕의 휠체어를 밀며 함께 복도를 걸어간다. 두 사람은 복도를 거침없이 능수능란하게 걸어 다니며 길을 잃는 법이 없다.

반대로 극 중에선 여왕이 패닉에 빠진 채 복도를 가로지르다 여기가 어디냐며 소리를 지르고 아비게일이 여왕을 데리러 오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만 보면 여왕은 상당히 불안정하고, 사라와 아비게일은 여왕보다 안정적이고 우세한 인물처럼 보인다. 이외에도 여왕이 사라에게 생떼를 부리거나 의지하는 모습, 여왕이 아비게일을 통해 만족감을 얻는 장면들이 많은데, 과연 앤 여왕은 정말 사랑에 휘둘리는 바보 여왕인 걸까?


아니다. <더 페이버릿>은 불안정한 여왕에게 애정을 바치며 그녀의 권력을 누리는 두 여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엔딩만 보면 오히려 넘을 수 없는 절대적인 신분의 벽을 보여주는 이야기에 가깝다.

사라와 아비게일이 아무리 재빠르게 복도를 걸어 다닌다 해도 결국 이 복도와 왕궁은 앤 여왕의 것이다. 하인인 두 사람은 어둡고 복잡한 복도를 걷고, 서로를 견제하며 온갖 노력을 해야만 밝고 넓은 여왕의 방에 닿을 수 있지만 여왕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방을 누리고 있는 왕궁의 주인이다. 여왕이 왕궁과 복도를 직접 만들지 않았을 뿐, 이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여왕의 것이고 여왕의 복도를 걷는 두 사람 또한 여왕이 가진 것의 일부에 불과하다.



사라와 아비게일은 자신이 여왕과 관계를 유지하면 여왕의 권력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매달리고 그녀의 위에 오르려 하지만 앤 여왕은 그 어떤 수를 써도 올라탈 수 없는 절대 권력이다. 아주 잠시 여왕의 권력에 올라탈 수는 있겠지만, 그건 여왕이 특별히 허락한 찰나의 순간에만 가능한 일이다.

오랜 시간 공들여온 사라의 계획은 앤 여왕의 말 한마디에 끝이 나고 사라는 출입 열쇠와 재산을 모두 뺏긴 채 국외로 추방된다. 아비게일은 이제 자신이 여왕을 주무를 수 있는 위치에 섰다고 생각하며 여왕의 토끼를 찍어 누르지만 여왕이 눈을 뜨자마자 여왕의 밑에 무릎을 꿇는다.

모든 걸 가졌다는 생각과 여왕을 주무르고 사욕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인의 착각일 뿐이다. 여왕의 옆에서 머무는 건 자신의 의지와 계략만으로 가능한 게 아닌 여왕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여왕에게 두 여인이 모든 걸 걸고 벌인 암투극은 여왕에게 있어 하나의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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