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이가 흘러넘치기까지
"사람들을 양동이와 같다고 상상해보자. 논 비건이 누군가와 말하고, 리플릿을 읽어보고, 매체에서 무언가를 볼 때마다 양동이에는 한 방울 한 방울이 더해져 천천히 차오른다. 밖에서 보면 여기에 물이 얼마나 차 있고 넘치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양동이가 넘쳐흐르기까지 오랜 시간 더해진 수백 방울의 결과이다. 계속해서 물방울을 더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양동이를 혼자서 채울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비건 세상 만들기> 247쪽, 토바이어스 리나르트
한 방울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학교 선생님께서 무분별한 환경파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마음이 참 아팠다. 배운 날엔 집에 와서 양치할 때 컵으로 하곤 했다. 하지만 늘 잘 잊어버렸다. 하긴 특별히 내가 환경에 대해 민감했다기보다 아마 누구든 그랬을 것 같다.
한 방울
2018년 6월쯤이었다. 시작은 미미했다. 나도 뉴스에서 중국발 쓰레기 대란을 살펴보면서 혀나 끌끌 차고 있었지 별다른 생활 속의 변화는 없었다. 마음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방법이 없다며 방관하고 손 놓고 있던 시기였다.
한 방울
죽은 고래 뱃속에서 비닐봉지가 가득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비닐봉지가 어떤 동물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물건이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찾아보니 내가 관심이 없었을 뿐 그런 일들은 이미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비닐을 먹고 죽은 고래, 빨대가 코에 찔린 거북이, 식스팩이라고 부르는 음료병 연결시키는 고리에 걸린 채 기형적인 모습으로 자라난 거북이, 면봉을 꼬리에 감고 있는 해마까지. 막연히 아름답고 신비로운 곳, 가끔 육지와 가까운 바다는 더러울 수 있겠지만 적어도 먼바다는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착각이 깨어지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한 방울
어디선가 <우리는 플라스틱 없이 살기로 했다>라는 책 소개를 본 것이 나에게는 가장 실질적인 변화가 아니었을까. 이 책은 한 가족이 플라스틱 없이 살아본 경험을 담은 책이다. 쓰레기 문제의 핵심은 플라스틱이다. 자연에서 온 소재들은 쓰고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낼 수 있지만 플라스틱 같은 합성소재들은 영영 썩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가볍고 싸고 젖지 않는 등의 특성으로 인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가족이 플라스틱 없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삶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게 되었다.
가장 먼저 바꾼 것이 칫솔, 비누, 수세미, 세제 등이다. 요즘도 '제로웨이스트' 혹은 '플라스틱프리'라는 생활 실천을 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는 품목들 인 것 같다. 예전에 제로웨이스트 난이도 표가 돌아다니기도 했었는데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난이도 하'에 속하는 물건들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제로웨이스트가 잘 알려지지 않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잘 못 찾아서 였는지 처음엔 엄청난 탄소발자국을 가진 대나무 칫솔과 비누를 썼다. 사실 그때는 탄소발자국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내 플라스틱 쓰레기가 0이 될 수 있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사 와야겠다는 기세였다. 심지어 영어에다가 예쁘게 디자인되어 자신의 기업의 가치를 알리는 팸플릿과 함께 오는 외국제품을 쓰며 '역시 선진국은 친환경적이야, 앞서 나가네'라는 사대주의의 사고를 갖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앞서 나가는 사람이야 라는 일말의 그릇된 자만감이 없다고 할 수 있었을까.
위의 것이 집에서 손쉽게 바꿀 수 있는 것들이라면 올 스테인리스 텀블러, 스테인리스 빨대, 빨대 수저집, 반찬통은 들고 다녀야 하는 '난이도 중'에 해당한다. 워킹맘이라는 핑계로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반찬가게 가서 4팩에 만원 하는 반찬을 사다 먹던 내가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기도 하다. '난 이제 반찬가게를 못 다니는 건가'
그러다가 전통시장을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전통시장에 가면 재료든 반찬이나 국이든 포장 없이 살 기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찬통을 들고 다니며 반찬을 사 먹기 시작하고 전통시장에 늘어서 있는 여러 가지 제철 신선한 재료들을 보며 누가 해주는 반찬만 먹기보다 직접 해 먹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친해진 채소가게 아주머니가 알려줘서 난생처음 취나물을 만들어보고 생미역을 사다가 초장에 찍어먹어보기도 했다.
내가 원하던 것은 그저 '쓰레기 0'이었는데 제로웨이스트를 하다 보니 내 삶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 이때쯤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이제껏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여겼는데 과연 그랬을까.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마트 가서 사거나, 반찬가게 가거나, 배달을 하거나, 사고 싶은 게 있으면 꼼꼼하게 비교하여 인터넷으로 주문하며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원해서' 산다고 생각했는데 마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내가 먹기 편한 레토르트 식품 대신에 취나물이나 미역을 선택할 가능성은 몇 프로였을까. '제로'였다. 단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으니까. 나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선택당하고 있었고 나는 소비를 한 것이 아니라 소비함을 당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낯가림이 있는 데다가 개인주의적 성향이라 최소한의 인력으로 많은 상품을 구비해놓고 알아서 담아가도록 하는 마트 시스템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요즘은 계산도 셀프로 하는 곳도 있다던데 말이다. 전통시장을 다녀 보고 나니 인건비를 줄이고 가격을 낮추겠다는 전략은 이해할 만 하지만, 그렇게 사람과의 접촉이 점점 줄어들도록 해 놓은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핵가족화, 교육경쟁시대로 인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위태롭게 가족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나를 채소가게 아주머니가 차근차근 가르쳐 주셨다. 생선가게 아주머니는 전에 펴져 있지도 않는 것을 '저.. 생선가스를 해보고 싶은데요' 했더니 냉동고를 뒤적여 열려둔 명태를 꺼내 주셨다. 필요한 거 있음 그냥 있지 말고 일단 물어보라고. 나는 그저 포장 없이 사고 싶어 찾았는데, 전통시장은 그런 곳이었다.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양동이가 흘러넘치고 보니, 어느새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