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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린 Aug 13. 2020

그 놈의 친환경

타인들의 시선

  '쓰레기 덕후'의 시작이 일종의 결벽증이었기 때문에 나의 활동반경은 어쩌면 '나'라는 개인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태생적 한계였을 지도 모른다. 그처럼 나는 한참동안이나 '나나 환경에 피해없이 살면 되지 네가 어떻게 살든 그건 너의 영역이야' 라는 태도를 지켜왔다.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강요된 친환경은 반발만 불러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의 행동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게 마련이었고 강요하지 않음에도 나에게 '불편함'을 내색했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든 타인과의 관계를 정립하지 않으면 안되는 순간이 오게 되었다.

 직장동료 4명정도 모인 자리였다. 차를 마시는데 당연히 종이컵을 내왔다. 나는 "저는 컵이 있어요." 하면서 내 자리로 가서 내 컵을 가지고 왔다. "(굳이 거기 까지 가지말고)그냥 이거 써" 라고 늘 권해보던 이가 내가 매번 컵을 가지러 가는 모습을 보고 '얘 보통 아니다'라고 생각을 했던지, 언젠가부터 "아유 채린씨 보는 데 종이컵 쓰면 안되는데" "채린씨 이번만 종이컵 쓸게" 라는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종이컵을 쓰라 쓰지말라할 권한이 있는가. 쓰지말라고 한들 안쓸 것도 아니면서 매번 나에게 그런 추임새를 넣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내가 그 자리의 프로불편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소한 것들을 지적해야 프로불편러 아닌가?  지적하지 않더라도 좋은게 좋은건데 굳이 종이컵 안쓰고 텀블러쓰는 내 존재 자체가 프로불편러인걸까.

  남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불편러라면 나는 불편러가 맞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왕 불편러가 될 것이라면 차라리 한마디 하고 불편러가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억울하지나 않지, 내가 무슨 소리를 했다고 이런 취급을 받는 걸까. 몹시 우울해졌다.

  내가 이사를 간 이에게 주방비누와 천연수세미를 선물해주었을 때는 이런 말도 들었다. '아, 친환경' (그놈의는 생략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억양이었다.) 친환경은 도대체 무슨 잘못인걸까. 그 쯤은 아마 이제 내 주변 사람들 중  알만한 사람들은  직장동료, 친구, 가족 할 것 없이  내가 다 알고 있는 상태였다. '친환경' 이 뭐라고 내가 환밍아웃을 해야할 만큼 정체성의 큰 변화를 맞은 듯이 다들 행동하는 것인지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커밍아웃과 비교해서 정말 죄송한 마음이지만 그들의 주변인 반응과는 당연히 180도 다르다. 거의 다 겉으로는 긍정적이다. "아, 그래? 텀블러 쓰는 구나, 맞아 그래야하는데. 장볼때 통들고 다녀? 너 대단하다." 속마음은 어땠을까. 긍정적이었던 모든 이들의 마음에도 티나게 부정했던 그 처럼 '아유 그놈의 친환경' 이라는 마음이 조금씩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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