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회용컵 처리에 대한 두번째 이야기
지난번 글에서 쓰레기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았다. 또 내가 미처 알지 못햇던 ‘플로깅’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나아가서 일회용품이 왜 그렇게 아무데나 버려질 수 밖에 없는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일회용컵, 크게 보면 일회용품의 가장 큰 문제는 쓰레기양을 늘린다는 데 있다. ‘생산하는 데 5초, 사용하는 데 5분, 썩는 데 500년’이라는 문구도 있었듯이 플라스틱이라는 물질 자체가 가지는 썩지않는 성질로 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썩지 않으므로 여기저기에서 차곡차곡 쌓일 수 밖에 없고 무분별하게 사용하다보면 쓰레기섬, 쓰레기 산 문제는 더 불거질 수 밖에 없다. 매립하거나 태워도 유해물질이 토양이나 공기로 배출된다는 점에서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처리해야 할 쓰레기 양 자체가 늘어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 단순히 양의 문제가 아니라 앞서 말했던 ‘처리’의 문제도 일회용품이기에 발생하는 측면이 있다.
일회용컵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한번 빙의해 봤다. 왜 저기에 그냥 두고 갔을까? 아마 마실 때는 ‘내 음료’ 였지만 음료가 다 끝난 뒤에도 여전히 ‘내 음료’라고 생각했을까? 이미 역할이 끝나버린 일회용컵의 이름은 이제 ‘쓰레기’ 가 된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내음료병’을 되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쓰레기’를 되가져 가는 일이 된다. 싫다. 아무리 깨끗한 우리집 식탁에 떨어진 밥풀이라도 그릇에 있으면 밥이지만 식탁에 떨어진 이상 ‘떨어진 밥풀’ 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 방금 마신 일회용컵이지만 이제는 ‘쓰레기’다. 먹고 난 직후여서 깨끗하고 심지어 내가 먹은 것이지만 쓰레기를 치우는 건 더럽고 귀찮은 일이 된다. 양심이 털이 나서 저런 행동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냥 누구나 별 뜻 없이 할 수 있는 행동이기도 하다. 저 일회용컵은 의도와 실수, 그 중간 어디에 서 있을 것이다.
텀블러를 사용했다면 저기에 놓고갈 리가 없다. 사용이 끝나도 여전히 ‘내 텀블러’이기 때문이다. 돈 주고 산 것인데다가 잃어버리면 아깝다는 자원절약의 문제를 떠나서 내 텀블러는 먹고 나서도 내 텀블러이지 ‘쓰레기’가 아니다. 더럽거나 귀찮거나 하는 느낌 자체가 없다. 일회용컵을 들고 다니다가 끝까지 집에 들고 와본 사람이라면 아마 느낌을 알 것이다. ‘텀블러 불편해, 귀찮아’ 라고 하지만 다마신 일회용컵 만큼 불편하고 귀찮을까? 내가 갖고 다닐 것이 아닌데 갖고 다닌다는 느낌, 빨리 쓰레기 통이 있다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텀블러는 먹다가도 꽉 잠가 가방에 쏙 넣으면 손이 자유로워지는데 쓰레기통을 발견하기까지 줄곧 손에서 떠날 수 없는 일회용컵이라니. 이처럼 아무데나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텀블러보다 훨씬 더한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요즘엔 길거리에 쓰레기통도 잘 없다.
일회용품의 목적은 ‘이동’ 이다. 어떤 물건을 어디에서 어딘가로 ‘잠시’ 이동시켜 준다. 카페에서 해변으로, 음식점에서 우리집으로.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지 포장 자체가 아니다. 포장은 포장을 여는 순간 제 역할을 다하게 된다. 불과 몇 분 전에는 새 상품으로 포장을 기다리던 깨끗한 용기였는데 그렇게 잠시 동안 역할을 다하고는 곧장 쓰레기가 된다. 의도와 실수의 어디쯤에서 대충 버려지고 그것의 행방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갖지 않는다. 자신이 버린 쓰레기도 누군가의 노동(자발적이든 임금노동이든) 으로 치워져야만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지점에서도 일회용컵 보증금제는 의미가 있을 지도 모른다. 100원이건 300원이건 되가지고 가면서도 쓰레기가 아니라 100원 짜리 물건을 가지고 간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이거 챙기면 100원!
농담이다. 아무데나 버리는 행동은 양심의 문제이지 돈 백원의 문제가 아님을 안다.
여러가지 이유로, 재활용이 곤란하고 비용이 드는데다가 기후에 악영향을 끼치므로, 또 되가져 오는 이들의 ‘상쾌한’ 기분을 위해서라도 보증금은 가능한 높게 책정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