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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수 Sep 04. 2020

벚꽃의 꽃말은 비염이니까

23년밖에 안 쓴 몸인데 A/S 안 될까요 (4)

    벚꽃은 찬란히 피었다가 금방도 져버린다. 분홍 잎 사이로 연둣빛이 어른어른 고개를 내밀 무렵이면, 또 거기에 밤 사이 봄비라도 한 번 내려준다면, 연약한 벚꽃은 건듯 부는 바람조차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다.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벚꽃은 또 그런대로 장관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장관을 마음 놓고 즐길 수 없는 건 그 아름다운 벚꽃의 또 다른 이름이 '비염'이기 때문이다.


    비염으로 처음 병원에 갔던 때를 기억한다. 그때 난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감기도 아닌데 계속 코가 막히고 간지러운 게 이상해서 영문도 모른 채 소아과를 찾았다. 그런데 그때 찾아간 의사가 좀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가 방문하고 얼마 안 가 소아과는 폐업했다.) 의사는 나더러 콧속에 살이쪄 그런 증상을 겪는 것이라고 장난 같은 진단을 내리곤 콧구멍 살을 빼는 것이 우선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 날엔 별다른 처방전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 딴엔 진지하게 콧구멍 살을 빼는 방법을 궁리했다.


    나중에야 제대로 된 이비인후과를 찾아가 알 수 있었다. 이비인후과에선 내 증상을 알러지성 비염이라고 진단했다. 이름이 없을 땐 그저 조금 거슬리는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비염'이라는 이름을 얻고 의기양양해진 녀석의 존재감은 전보다 비대해졌다. 그 이후로도 비염은 한 평생 나를 괴롭혀왔다. 환절기엔 환절기라서, 겨울엔 겨울이라서, 여름엔 에어컨이 문제, 가을엔 일교차가 문제. 비염이 나를 괴롭히는 데 별 다른 명분은 필요 없다. 어떤 핑계를 가져다 붙이든 타당한 원인이 되고 구실이 된다.


    그러니 어디 벚꽃의 꽃말만 비염이랴. 꽃가루가 극성인 5월엔 송화의 꽃말도 비염이 되고 습하고 축축한 장마철엔 장마의 꽃말도 비염이 된다. 간혹 잠을 적게 자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엔 길에서 스치는 고양이나 우리 집 강아지마저 비염의 원인이 되어 날 괴롭힌다. 정말로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격이다.


    모종의 이유로 알러지성 비염이 도지면 내 몸에선 다양한 증상이 발현한다. 가장 먼저 얼굴 피부가 근질거리기 시작하는데, 그중에서도 눈가와 입 주변이 유독 심하게 간질거린다. 그즈음 거울을 보면 얼굴 곳곳이 붉게 변한 걸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눈도 함께 간질거린다. 꼭 먼지라도 들어간 것처럼 눈에 이물감이 느껴지고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려워진다. 그렇게 가려운 대로 비비적거리다 보면 결국 눈이 잔뜩 부어버린다. 꼭 만화 속 효과처럼, 눈알이 '띠용-'하고 튀어나온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입체감이 느껴질 만큼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작아진 옷을 구겨 입는 듯한 불편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코가 문제다. 콧속이 간질거리다가 재채기가 나오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코가 막히기도, 콧물이 흐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코막힘은 밤이 되면 더욱 심해진다. 잠에 들어보려고 잠자리에 누우면 코가 막혀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렇게 죽는 비참함을 모면해보려 옆으로 돌아누우면 그나마 한쪽 콧구멍이 뚫려 목숨은 연명할 수 있게 된다. 왼쪽 콧구멍과 오른쪽 콧구멍이 번갈아가며 뚫리고 막히기를 반복하는데 양쪽 콧구멍이 일종의 교대근무를 하는 모양새다. 사람이 생긴 모양을 보면 입구멍은 하나인데 콧구멍은 두 개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비염인이 되면 익숙해지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기다란 쇠꼬챙이를 콧속에 집어넣는 일. 이비인후과에 가면 필수적으로 거처야하는 과정이다. 비강이 부어있는 상태를 진찰하기 위해 내시경을 넣어보는 것인데, 처음 할 때는 그 느낌이 끔찍하게 싫어 생각만으로도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좁디좁은 콧속이 깊어봤자 얼마나 깊으려고, 끝을 모르고 들어가는 쇠꼬챙이에 기겁을 해서 '이러다가 잘못하면 뒤통수가 뚫리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도 가져보았다. 여러 번 해보니 그 걸로 뒤통수가 뚫릴 일은 없다는 걸 알았다. 어엿한 비염인이 된 이제는 그것도 익숙하다. 오히려 덤덤하게 눈으론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나도 함께 내 콧 속 상태를 관찰한다.


    둘째는 매달 적지 않은 돈을 항히스타민제를 사는 데에 쓰는 것. 지르텍, 씨잘, 노텍, 코나진, 알러샷 등 약명을 나열하자면 목록이 길어진다. 안 써 본 제품이 없는 것 같다. 약국 약을 산 적도 많고 이비인후과 처방약을 먹은 적도 있다. 항히스타민제는 참 신통하게도 특별한 부작용이나 내성 없이 증상을 완화시켜준다. 눈가가 간지러운 전조증상이 나타났을 즈음 알레르기약 한 정을 먹어주면 증상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가려움도 잦아든다. 한 가지 있는 단점이라면 복용 이후의 졸림과 나른함 정도인데 그마저도 그리 심하게 느껴지는 수준은 아니다.


    말이 나와 생각 난 다소 무관한 이야기가 있다. 작년에 본 노르웨이 드라마(SKAM)에 고등학생들이 항히스타민제의 일종인 지르텍을 진정제처럼, 그러니까 마치 마약처럼 복용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걸 보며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우스웠다. 실제 마약에 비하면 기별도 안 갈 수준일 텐데 그걸 진정제랍시고 먹는 게, 저러면 물배만 부르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랬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이 나와 같은 비염인에겐 양날의 검과 같다. 매일 200명을 웃도는 확진자 수 때문에 두렵고 답답한 근황과는 별개로, 알레르기 증상은 훨씬 호전되었다는 거다. 요 몇 달 외출도 않고 마스크를 몸의 일부처럼 챙겨 쓰곤 했더니 알레르기원이 전부 차단된 모양이다. 비염이 도지는 잦기가 확실히 줄었다. 방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으니 방청소를 제때 하고 환기를 자주 시켜주기만 하면 문제없다.


    비염도 오래 지내다 보니 나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익숙함이 무서운 법이라고, 이젠 콧구멍이 막혀 숨이 안 쉬어져도 덤덤히 나잘 스프레이를 뿌리고 하던 일에 몰두한다. 한껏 문지른 탓에 붉게 헐어버린 코끝도 아무렇지 않아 졌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이게 그리 큰 불편 인지도 모르겠다. 내 삶의 질이 이미 비염인의 삶으로 하향 평준화되어있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하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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