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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이맘 Mar 12. 2021

워킹맘의 변명

결국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뛰쳐나오다

워킹맘, 일하는 엄마

주변에서, 언론에서 워킹맘이 문제다, 힘들다 할 때도 이런 말하기 부끄럽지만, 사실 난 그게 내 앞에 닥쳤을 때 조차도 워킹맘이 무슨 대수냐 싶었다.


'일할 땐 일하고, 육아할 땐 열심히 아기 보면 되지. 원래 여러 가지 일들을 한 번에 잘 처리하던 나 아닌가?'

게다가 우리 집과 물리적으로는 한 시간 남짓 떨어져 있지만 결혼 전부터 아기 낳으면 당연히 봐주시겠다고 하시던 친정 부모님도 계시지 않은가. 일하는 와이프, 며느리도 다 이해해주는 신랑과 시부모님도 계시고, 워킹맘 따위 못해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난 90일이 막 지난 핏덩이를 친정 부모님 품에 맡기고 복직을 했다. 대학병원 전공의들에게 출산휴가는 고작 90일. 육아휴직 따위는 처음부터 선택지에 아예 없고 심지어 둘째를 낳아 출산휴가를 2번이라도 쓰게 된다면 총 레지던트 수련기간인 4년을 꼬박 다 마치고 나서도 해당 개월 수만큼 추가수련을 해야 한다. 충분한 수련을 받은 전문의를 길러내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은 여자 전공의들에겐  몹시 아쉬운 대목이다. 나도 출산휴가 90일을 전부 아기와 함께 쓰고자 출산휴가 시작일에 맞춰서 유도분만도 했던 터였다(아... 그때의 고통이란... 세상 모든 엄마들 정말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렇게 주중에는 친정에서, 주말에는 우리 집에서의 공동육아가 시작되었다. 젖병소독기도 2개, 분유 포트도 2개, 젖병도 넉넉히 준비했지만 매 주말마다 남편과 나는 이삿짐 같은 아기 짐을 매번 이집저집으로 날라야 했다. 그 주에 잘 갖고 놀았던 장난감, 그 주에 유독 잘 먹었던 간식, 애착 인형 등등. 엄마와 난 점차 짐 싸기의 달인이 되어갔다. 척하면 척! 착하면 착!이지만 간혹 친정집에 애착 인형이라도 빼놓고 온 주말이면 호되게 아기한테 혼쭐이 나고 '방심은 금물이다'를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주중에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 아기를 데리러 가면 지난주에는 엎드려서 고개 드는 것도 힘들어했던 아기가 어느새 뒤집고 있었고, '우리 아가 이젠 제법 네발로 잘 기네'했더니 어느새 붙잡고 서고, 또 금세 걷기 시작했다. 잘 자라 주는 아기가 정말 너무너무 고마웠지만, 내 마음 한편엔 속상함과 미안함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아기의 첫 뒤집기도, 첫 배밀이도, 첫걸음마도 우리 부부는 함께하지 못했다. 가끔 tv에서 아기가 처음 걸음마를 내딛을 때 부모가 깜짝 놀라 아기를 껴안아주며 감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괜스레 내 마음이 아려왔다. 다시 못 올 그 소중한 순간들이 그렇게 다 지나가고 있었다.


6개월 영유아 검진을 갔을 때에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던 적도 있었다. 아기 보는 것도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 힘든데, 내가 꼬치꼬치 물어보거나 육아에 대해 너무 관여하면 혹여 친정엄마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진 않으실까 해서 되도록 주중 육아에 대해 크게 여쭤보지도 관여하지도 말자가 내 원칙이었다. 그러다 보니 의사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것도 많고, 당황하니 빽빽 울어대는 아기 컨트롤도 더더욱 안되고 아주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었다. 자격지심이겠지만 마치 진짜 애 엄마 맞아?라고 묻는 듯한 선생님의 표정을 보면서 얼굴이 화끈화끈, 나 자신한테도 너무 화가 났다.

'난 진짜.... 엄마가 맞는 걸까?'


10개월 무렵에 한 번은 아기가 호되게 아팠었다. 내내 물 설사를 찍찍한다고 하더니 한 밤중에 친정아버지에게 급하게 전화가 왔다.

"열이 펄펄 나서 해열제 먹이려다 사레들려서 갑자기 숨을 못 쉬면서 얼굴이 새파래졌었어. 너무 놀래서 119전화했더니 다행히 거기 대원이 침착하게 대처방법 알려줘서... 지금은 괜찮아지기는 했는데 애기가 쳐지는 게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

심장이 쿵하고 덜컥 내려앉았다. 일단 집 근처 소아응급실에 가신다고 했다. 평일에다 연차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직업인지라 대책이 없기는 했지만, 남편과 나는 언제든 친정으로 날아갈 태세를 하고 다음 연락을 기다렸다.

"열나서 소아과 의사 진료 보려면 그전에 코로나 검사하고 결과 나올 때까지 병원 밖에서 몇 시간이고 대기해야 한다는데... 지금은 상태가 그래도 괜찮아져서 일단 집으로 돌아갈게. 걱정되면 아침에 아빠가 애기 데려다줄게"

엄마가 소아과 의사인 게 무슨 소용이람.

옆에 없는데...

.

.

.

그렇게 아기도 우리 부부도 친정부모님도 고된 1년이 지나고, 난 드디어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같이 전공의 수련을 받았던 친구들은 코로나 시국에 동네 소아과 사정이 어려워 대부분 새로 개업하거나 봉직의로 취직하지 않고 기존의 대학병원에 남아 근무를 계속하기로 했다.


그리고 난,

워킹맘을 그만두기로 했다.

대학 입학부터 전문의를 따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문의로 멋지게 살아갈 그 날 만을 꿈꾸며 잠 못 자고 고된 하루하루도 버텨왔었지만 정작 서른 하나가 된 나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전문의라는 타이틀도, 내 꿈도 아니었다.

바로 우리 가족, 소중한 내 딸, 듬직한 내 남편이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내 선택이 바보 같다고, 또 복에 겨운 소리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워킹맘이 제 풀에 지쳐 결국 일 그만두는 뻔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육아에 지치다 보면 나 스스로도 이 선택을 후회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람마다 사는 모양새는 다 다른 거니까. 나는, 잠시 나 자신을 내려놓고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삶을 그려보기로 했다. 그게 지금의 나 자신의 가치를 더욱더 빛내줄 거라고 믿는다.

아가와 남편과 다가올 그 빛나는 순간들을 온몸으로 끼리라, (비장하게) 혹여 그것이 혹독한 육아전쟁의 시작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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