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아일보 Aug 29. 2016

올림픽→추격자→부산행→터널→대통령

국민은 국가가 자신을 진짜로 사랑해 주는지, 그것이 알고 싶을 뿐이다. 

 1  얼마 전 막을 내린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보면서 나는 ‘추격자’라는 끔찍한 영화를 퍼뜩 떠올렸다. 이유는 황당할 만큼 단순하다. ‘추격자’에서 살인마 하정우에게 도륙을 당하는 출장안마업소 여종업원 서영희의 어린 딸이 “너희 아빠 어디 있니?” 하고 묻는 안마업소 사장 김윤석의 질문에 이렇게 무심하게 대답하기 때문이다. 


“아빠는 본 적 없어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일하러 갔어요.”


리우데자네이루. 영화에 딱 한 번 뜬금없이 등장하는 이 도시 이름은 언뜻 영화 내용과 무관한 듯 보이지만 욕망과 섹스, 원죄와 구원, 살육과 생존이라는 이 영화의 키워드가 고스란히 겹쳐지는 장소라는 점에서 나는 참으로 절묘한 상징이란 생각을 하였다. 


어쩌면 ‘추격자’에서 만날 ‘삽질’만 하는 경찰이 못 미더워 스스로 종업원을 구해 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똥끝이 타는 김윤석에게 있어 대한민국은, 개인의 생명과 안전을 더는 지켜 주지 못하는 욕망과 혼돈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와 다름없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2  ‘추격자’를 보노라면 ‘부산행’이란 좀비 영화가 대번에 떠오른다. 이번에도 이유는 단순하다. ‘추격자’에 나오는 상점 이름 ‘개미슈퍼’와 ‘부산행’에서 개미(개인투자자)들의 피(투자금)를 빨아먹는 악덕 펀드매니저로 출연하는 공유의 휴대전화에 별도 분류된 ‘개미들’이란 폴더 이름이 모두 ‘개미’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추격자’ 중 살인마의 소굴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서영희가 숨어드는 동네 상점의 이름이 ‘개미슈퍼’다. 그녀는 전화로 경찰에 도움을 청하지만 경찰차에서 낮잠에 빠진 경찰이 제때 출동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살인마에게 목숨을 잃는다. 


나는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겸한 나홍진 감독이 ‘개미슈퍼’란 이름을 굳이 사용한 것은 내밀한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본다. 서영희처럼 돈 없고 ‘빽’ 없는 국민은 결코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한낱 ‘개미’처럼 속절없이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 말이다.

매우 공교롭다. ‘부산행’은 ‘추격자’와 흡사한 메시지를 던지면서 우리의 공감과 공분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말이다. 


‘부산행’에서 정부는 좀비들의 창궐을 “폭력 시위”라고 단정하면서 “동요하지 말고 정부를 믿으라”고 당부하지만, 정작 공포에 노출된 개인을 구제할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무섭고 쓸쓸한 이야기를 이 영화는 건네는 것이다. ‘부산행’이 “‘각자도생(各自圖生)만이 답’이라는 ‘헬조선’의 지옥 같은 현실을 은유한 것”이라는 일각의 해석을 낳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무능한 국가는 좀비보다 더 끔찍하다는 것이다.



 3  ‘부산행’을 생각하면 얼마 전 본 ‘터널’이란 영화가 또 떠오른다. 개통 1개월 된 터널이 무너진다. 평범한 시민 하정우가 깔려 구조를 요청하면서 나라에 난리가 난다. 현장에 온 장관은 정작 구조보단 “대통령님의 지시에 따라 정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는 복장 터지는 입발림 발표만 하고 기념사진 찍느라 바쁘다. 영화 속 이런 장면들은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도 하고, 장관을 여성(김해숙)으로 설정함으로써 왠지 모르게 현실 속 대통령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터널’을 관통하는 대사는 건설업자의 이런 퉁명스러운 한마디다.


“대한민국에 에프엠(원칙)대로 하는 게 뭐가 있나요? 여긴 운이 없어서 그런 거지….” 


결국 오늘도 살아 숨쉬는 우리는 단지 운이 좋아서일 뿐이라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나를 살리는 것은 오직 나 스스로의 의지일 뿐, 국가는 개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부산행’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4  ‘터널’이란 영화를 생각하면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새삼 떠오른다. 영화 속 터널이 붕괴된 것처럼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는 어느새 소통이란 이름의 터널이 무너져 내린 듯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자신의 애국심과 진정성을 국민이 몰라주는 것 같아 슬프고, 국민은 대통령이 국민의 고통과 고민을 몰라주는 것 같아 슬프다.

나는 정치를 모르지만, 왜 많은 국민이 ‘추격자’나 ‘부산행’이나 ‘터널’ 같은 영화에 공감하는지 우리의 대통령이 곰곰이 살펴본다면, 무너져 내린 소통의 터널을 복구할 올바른 해법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국민은 단지, 국가가 자신을 진짜로 사랑해 주는지, 그것이 간절히 알고 싶을 뿐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매거진의 이전글 지성과 본능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