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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폰더 Feb 17. 2023

포장이냐 내용이냐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하고 싶은 특별 활동반이 따로 있었으나 주재 넘게 남들 눈치 보느라 또 문예반을 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줄곧 문예반이나 도서부였다. 문학에 대단한 열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이전 글 '회귀 본능'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린 시절의 나는 글재주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냥 돈 안 들고 튀지 않는 활동을 고르다 보니, 또 꽤나 지적인 척하고 싶다 보니 내 기준에서 들어가기 쉬운 반을 골랐다. 사실 연극 동아리나 걸스카웃이 하고 싶었는데 그건 소위 '잘 나가는' 아이들이 주류여서 발길조차 향할 엄두를 못 냈다. 어릴 때부터 혼자 눈치 보며 쭈그리고 사는 게 아주 일상이었다.

    

    문예반 활동이 쉬운 건 아니었지만 들어가기는 쉬웠다. 소수의 문학도를 제외하곤 대부분 정말 할 게 없어서 지원했기 때문이다. 특별 활동 첫날부터 대차게 엎드려 자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 정도 필력이면 짱 먹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한 학기 동안 문학의 기초를 배우며 글을 써서 내고 그중에서 선발된 작품은 학예회에 전시할 수 있었다. 당연히 자신 있었다. 내 작품이 안 될 리가 없었다. 그때까지 크고 작은 대회에 나가 수상하지 못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첫 번째 선발에서 내 작품이 안 됐다. 대단한 욕심이 없었지만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담당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유를 물었다. 글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였다. '뭐라고요? 그럼 17살이 어떤 글을 써야 하는데요?' 이런 물음이 혀끝을 맴돌았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그냥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작정하고 쓰면 얼마나 어렵고 난해하게 쓸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며 일주일 내내 글쓰기와 씨름했다. 들고 간 작품은 당연히 통과했고 학예회에 전시했다. 기쁘지 않았다. 액자화 된 그 작품을 볼 때마다 속이 쓰렸다. 그리고 이 사건을 발단으로 나는 더 이상 대회에 나가지도 않았고 글을 쓰지 않았다. 


    반항심이 들었다. 진심으로 쓴 순수한 글은 표현이 직설적이라는 이유로 단순하고 어리다는 평을 받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를 미사여구로 함축된 글이 훌륭하다고 선정된 것이다. 물론 글을 쓸 때 은유와 함축은 글을 풍성하게 해주는 좋은 장치이다. 하지만 어린이가 짙은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위태롭게 뒤뚱거리는 걸 장려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왜 그걸 어른스럽고 대견하다며 칭찬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학에서는 가짜 글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경험하고 글쓰기를 놓았다. 그리고 돌연 고2 때는 방송반에 들어갔다.


    아직도 그때의 일은 상흔처럼 남아있다. 글을 쓸 때마다, 특히 시를 쓸 때마다 묻게 된다. 표현이 중요한가 내용이 중요한가. 포장이 중요한가 선물이 중요한가.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수준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글을 쓰다 보면 하얀 여백에 까만 글씨들은 산으로 가고 있다. 독자를 의식해 쓰는 멋지고 좋은 표현이 글의 내용이나 진심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 아직도 나는 답을 모르겠다. 일기처럼 쓰는 이 글도 누군가에게는 단순하고 포장 없는 홑겹 잠옷처럼 여겨지겠지만 또 누군가는 이 안에 녹아있는 눅진한 나의 고민과 시간들을 볼 거라 믿는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시간을 들여 보는 글이라면 마음을 뒤흔드는 명필이면 좋으련만 어찌 매번 그럴 수 있을까? 오히려 일상적인 말로 아름다운 운율을 느끼게 하고 그 안에서 뜻을 찾는 게 더 멋진 일인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문학과 멀어졌지만 여전히 글쓰기를 좋아한다. 글 앞에서 솔직하고자 노력한다. 부지런하진 않지만 가끔 에세이를 쓰고 시를 쓴다. 내 맘대로 쓰는 글이지만 내 맘같이 공감해 주는 이들이 있어 감사하고 잠깐의 시간을 들여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소중하다. 나는 대단한 유명 작가도 아니니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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