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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l 09. 2021

생일 축하합니다

2010년 글틴 청소년 문학상 생활글 연장원 수상

-선생님 다음 주 토요일이 할머니 칠순이셔서 가족끼리 모여서 밥을 먹기로 했어요. 수업은 못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저번 주에 과외 선생님께 보낸 문자메시지 내용이다. '손자 대학 가는 건 보고 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시던 할머니가 어느새 손자 놈 대학교 갈 해의 생일을 맞으셨다. 아직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 가는 모습을 보시지는 못했다. 재수를 선택해버린 못난 손자 놈 때문에 할머니의 작은 바람은 최소한 1년간의 유예기간을 추가로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내년 내 입학식까지 할머니가 살아계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래서 할머니가 내 입학식을 보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도 요즘 부쩍 건강이 안 좋아지신 할머니를 보면 조금씩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부모님의 맞벌이 탓에 어린 시절을 할머니와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 할머니가 엄마처럼 나를 키워주셨다. 2살부터 7살까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시간이 아직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 집에는 나와 할머니, 할아버지, 외삼촌 이렇게 네 식구가 같이 살았다. 우리 네 식구 확대가족은 조금씩 불편할 때도 있지만 나름대로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 중 하나였다. 유치원에서 엄마를 데려오라고 하는 날이면 할머니가 와 주셨고,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삼촌은 아빠 대신 회초리를 드셨다. 우리 집에 있었던 나무로 된 4인용 식탁은 언제나 우리 네 식구로 꽉 차 있었다.

 

 나에겐 요즘 아이들과 다르게 그리고 우리 엄마가 원하는 아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낙천적이고 매사에 태평한 면이 있다. 충청도가 고향인 우리 할머니에게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웠나 보다. 인천 우리 집에 에어컨이 처음 설치되던 날부터 그 달 전기요금이 나오던 날까지 할머니와 나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에어컨을 켜 놓고 낮잠을 잤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그냥 누워서 둘이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며 할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누워있기도 했다. 엄마의 어릴 적 얘기, 삼촌 어릴 적 얘기, 할머니 어릴 적 얘기...... 분명 어제도 듣고 엊그제도 들었던 얘기임에도 별로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달 전기요금 고지서가 집으로 배달된 날 어마어마한 전기요금에 놀란 할머니는 더 이상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 그 대신 선풍기 2대를 켜 놓고 거실 바닥에 누워 엄마의 어릴 적 얘기, 삼촌 어릴 적 얘기, 할머니 어릴 적 얘기들을 한 모금 한 모금해 주셨다. 몇 번째 듣는 그 얘기들을 듣다가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조용히 잠이 들었다.

 

초등학교 입학식 전날 밤 잠자리에서 할머니 옆에 누워 학교 가기 무섭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학교를 간다는 것이 괜히 할머니와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할머니는 졸린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해주면서 나를 토닥여주셨다. 그러면 또 아무 이유 없이 울음을 그치고 조용히 잠이 들기도 했다.

 

할머니, 엄마의 엄마를 나는 할머니라고 부른다. 엄마의 엄마를 지칭하는 단어이고 '엄마'보다도 긴 단어이지만 그때까지의 나에게 할머니라는 말은 엄마 이상의 엄마 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엄마는 내 교육을 위해 은행을 그만두셨다. 그때부터 할머니와 떨어져 아빠와 엄마와 나 이렇게 셋이서 함께 살게 됐다. 할머니랑 떨어지는 게 못내 서운했지만 서운한 티를 내면 엄마 아빠가 슬퍼할까 봐 애써 티를 감췄던 기억이 난다. 엄마랑 같이 살면서 엄마에 익숙해지고 인천 친구들과는 다른 서울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나는 할머니와 조금씩 멀어져 갔다. 명절 때 한 번씩 할머니를 만나면 이상하게 존댓말이 나왔다. 몇 개월에 한 번씩 보는 할머니는 눈에 띄게 늙어가고 계셨고 나는 영원히 늙지 않는 내 추억 속의 할머니와 점점 늙고 계시는 눈앞의 할머니를 천천히 분리시켰던 것 같다.

어느 추석 때에는 할머니 집에 온 가족이 다 모였었다. 자연스럽게 옛날 얘기가 나왔고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같이 눈물을 흘렸고, 그걸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13살짜리 나는 엄마한테 울면서 소리쳤던 것 같다. 왜 할머니를 울리냐고. 어렸을 때 엄마네 집이 가난했던 게 할머니 탓이냐고. 나는 엄마한테 대들었으므로 죽도록 맞았고 할머니는 나중에 조용히 나를 불러 핀잔을 주었다. 내가 할머니 편을 들면 엄마는 많이 슬플 거라고. 나는 엄마한테 그러면 안된다고.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느껴져서 또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 편을 들었는데도 칭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모든 걸 참고 사시는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 허리 수술을 하신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왔다. 재수 학원이 끝나고 집에 와서 할머니를 보고 나는 반가움보다는 알 수 없는 슬픔과 불편함을 느꼈다. 약을 잘못 먹어 생긴 부작용 때문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뚱뚱해지신 할머니가 낯설고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허리 수술 후 재활 기간이라 거동도 불편하신 할머니의 뭉칠 대로 뭉친 어깨를 주물러드리면서 우리는 13년 전처럼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왜 할머니 집이 아니라 여기 오셨냐고 물어봤고 할아버지와 싸워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여기 오셨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참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했다. 할머니는 요즘 몸 여기저기가 쑤신다고 하셨고 나는 빨리 한의사가 돼서 이곳저곳 아픈 곳이 하나도 없게 해 드리겠다고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할머니와 거실에 이불을 펴고 누워서 세상 얘기들을 했다. 이제 매번 듣던 엄마 어릴 적 얘기가 아니라 나 어릴 적 삼촌 하고나 했을 법한 얘기들을 나눴다. 나는 예전보다 훨씬 많이 말했고, 할머니의 말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은 할머니의 말을 끊고서라도 물어보고 넘어갔다. 나는 할머니가 못 알아들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말들은 하지 않았고 계속 말을 하느라 예전처럼 할머니 얘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잠이 오지도 않았다. 새벽 1시 반쯤 할머니는 수면제를 드셨다. 나는 누워서 눈을 감고 그날 할머니와 나눴던 얘기들을 곱씹고 있었다. 정치 얘기, 경제 얘기, 올림픽 얘기. 이제는 수면제 없이는 한 숨도 주무시지 못한다는 할머니 옆에서 나는 그제야 아까 못했던 얘기들을 꺼내놓는다. 할머니 왜 이렇게 늙으셨냐. 할머니 왜 이렇게 아프시냐. 내일 아침 학원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수면제 대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았다.


 내일은 할머니 생일이다. 그리고 나는 엄마와 작은 말다툼을 벌였다. 할머니 칠순에 가려고 과외 수업을 하루 취소했다는 소리를 듣고 엄마는 기겁을 하셨다. '그 수업이 한 번에 얼마짜리 수업인 줄 아느냐'로 시작한 잔소리는 '재수생인 네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를 거쳐 결국 '그 수업이 한 번에 얼마짜리 수업인 줄 아느냐'로 마무리됐다. 나는 내가 한 행동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한 마디씩 맞서다가 이내 엄마 말에 수긍하고 말았다.

 

"그래 할머니 못 본 지 오래된 것도 아닌데 그냥 나는 집에 있을게."

 

"그래, 너한테 지금 뭐가 중요한지 잘 생각해 봐라. 그런 건 너한테 전혀 중요하지 않아 넌 네 공부만 신경 써. 그리고 할머니한테도 그게 효도하는 거야."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수학 과외 수업과 평생에 한 번 있는 할머니의 칠순잔치 중에 나는 수학 과외 수업을 선택했다.

 

-선생님 죄송한데요. 내일 수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선생님께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오랜만에 할머니에게 효도를 하는 나는 오랜만에 마음이 굉장히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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