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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pr 23. 2020

10킬로의 벽을 넘어라 120킬로

월간 에세이-3월

10km


숨을 헐떡이는 여자 친구의 전화를 받는다. 10km 마라톤에 참가할 예정이라 언니와 함께 연습했다고 한다. 숨을 꼴딱 꼴딱 힘겹게 넘기며 겨우 겨우 말을 이어간다. “대단하네~” 하고 리스펙을 표한 뒤 전화를 마친다. 대단하긴 하지만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10km는 차를 타고 움직일 때나 생각해 본 거리이지 맨 몸으로 움직이는 것은 해 본 적도, 할 계획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는 어려서부터 운동과 친했다. 아버지는 체대 출신의 직업군인이셨고, 언니는 꽤 오랫동안 골프 유망주였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내왔다. 늘 초고도 비만이었기 때문에 학교 체육시간에 체육선생님 마저 나는 열외로 인정해주셨기 때문이다. 흔히 100억이 있는 사람보다 200억이 있는 사람이 2배 부자라는 느낌은 들어도, 100조가 있는 사람과 200조가 있는 사람은 똑같이 ‘돈 많은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내 감각의 영역을 벗어난 큰 숫자인 10km이기 때문에 그냥 막연히 대단하다는 느낌밖에는 안 들었다.


5km


반면 여자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과 매우 친했다. 매일 아침 새벽 수영을 하고 학교를 갈 정도였다고 한다. 나와 지내면서 운동과 멀어졌던 것 같아 약간의 미안함도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예전의 자신을 찾은 여자 친구를 보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나에게 같이 마라톤에 나가자고 할 때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자 친구는 10km가 힘들다면 5km를 연습 삼아 뛰어보자고 했다. 하지만 난 살면서 쉬지 않고 1km 이상 달려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5km는 10km와 마찬가지로 어차피 불가능일 뿐 큰 차이도 없어 보였다.

 몇 주 전 같이 치악산 정상을 밟아보자고 여자 친구가 제안했을 때에도 그랬던 것 같다. 분명 처음에는 그런 걸 왜 하냐고 절대 안 한다고 했다가 어느새 따라서 산을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안 한다고 안 한다고 했지만 지치지 않는 여자 친구의 설득 끝에 우리는 어느새 학교 운동장에서 5km 여정을 달리고 있었다. 처음엔 내가 치고 나갔지만 몇 바퀴 돌지 않아 여자 친구에게 추월당했다. 난 한참을 앞서고 있었지만 이내 더 이상 뛸 수 없는 체력의 한계에 도달해서 걷고 있었다. 여자 친구는 처음부터 그렇게 빠르지 않은, 그렇지만 일정한 속도로 5km를 완주했다. 죽을힘을 다해 걷다 뛰다를 반복해 보았지만 여자 친구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려서야 완주할 수 있었다. 옆구리가 아프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다시는 주제에 안 맞는 도전을 하지 말아야겠다 결심했다.


7km


 여자 친구의 설득은 계속됐다. 몇 번만 더 참고 뛰면 이제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역시나 어느샌가 같이 운동장을 돌고 있었고, 2번 더 5km를 완주했다. 이제는 거리를 늘릴 때라고 했다. 이번에는 7km에 도전하자고 한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몇 번 거절은 했지만, 사실 나도 슬슬 거리를 늘리고 싶던 차였다. 처음에는 빨리 해치워야 할 숙제 같았다면, 점점 뛰는 그 과정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었지만, 점차 달리는 동안 호흡과 맥박이 안정되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당기고 코어에 힘을 준 다음 고관절을 앞으로 내미는 느낌으로 허벅지로 내딛는다는 생각으로 앞으로 치고 나간다. 너무 빨라서도, 너무 느려서도 안된다. 30분을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강도로 달려야 한다. 심폐가 안정되고 나니 점점 주변의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나무와 강, 강가에는 제각각의 모습으로 예쁘게 생긴 집들도 많았다. 묶여있는 강아지들은 마치 자기들도 뛰고 싶다는 양 짖어대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달리기를 위해 준비된 무대처럼 느껴졌다. 분명 5km도 숨이 넘어갈 듯했는데, 7km를 완주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10km


 첫 5km를 달린 후 정확히 2주 만에 10km 완주에 성공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당기고 코어에 힘을 준 다음 고관절을 앞으로 내미는 느낌으로 허벅지로 내딛는다는 생각으로 1시간여를 달렸더니 10km가 지나 있었다. 이상하게 하나도 숨이 차지 않고 뛰면 뛸수록 발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걷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달릴 수 있었다. 9km가 지나면서는 점점 기분이 성취감에 고취되어 갔다. 몸의 통증은 어느 순간 느껴지지 않고 태어나 처음으로 10km 마라톤을 완주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설렜다. 운동장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두고는 전력질주를 했다. 역시 전혀 숨이 차거나 힘들지 않았다. 마지막 10km 완주 알림을 들으며, 나는 여태껏 나를 옭아왔던 어린 시절의 ‘뚱뚱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뚱뚱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1시간을 쉬지 않고 뛸 수 있는 체력을 가진 체육인이 된 것이다!


첫 완주 이후 2주간 총 3번 더 10km를 완주했다. 첫 완주 다음날 후유증은 대단했다. 뛸 땐 몰랐지만 다음날 발바닥이며 무릎, 등까지 여기저기 쑤시고 아팠다. 여자 친구는 첫 10km가 힘들었을 나를 배려하느라 페이스 메이킹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제는 제법 혼자서도 페이스 조절을 하며 달릴 수 있는 마라토너가 되었다. 학창 시절 오래 달리기를 하면 꼴찌로 들어와서 가장 오래 달린 학생이 되곤 했던 120kg의 거구가 이제 10km를 1시간에 완주할 수 있는 마라토너가 된 것이다.


날씨가 좋다. 오늘은 내가 먼저 제안해 봐야겠다. 달리러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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