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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다.
꿈에서 막 빠져나온 의식은 반갑게 마중 나온 오늘과 인사를 할까 말까 뭉그적댄다. 몸을 둥글게 움츠리며 어깨에 살짝 얹혀있던 이불을 얼굴까지 당겨본다. 어떻게든 오늘의 시작을 늦춰보려고 눈을 질끈 감아본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은 정확한 패턴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하루를 맞이하는 나의 반응은 재빠르지 않다.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꾹 누르면 몇 초 후 하늘을 닮은 바탕화면이 훤히 켜지는 것과 달리 수평선 저 멀리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처럼 은근한 워밍업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아침을 맞이할 때만 적용되지 않는다.
일의 시작에 앞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일종의 의례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학교 다닐 때 시험 기간의 일이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꼭 책상 정리를 하곤 했는데 문제는 정리 정돈에 소요되는 시간이 진짜 해야 하는 공부의 시간을 초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뒤로 미루려는 꼼수였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이런 의례가 필요 없다. 설렘과 열정으로 좋아하는 일들이 모여 있는 동그라미 속을 다이빙하듯 퐁당하고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일이 시작되는 모양은 마치 전자기기들의 전원 버튼을 닮아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비효율적인 정리를 의례로 진행하지 않는다. 성인이 되며 아주 편하고 간단한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일을 시작하기 전 믹스커피를 타 마시는 것으로 시스템 진입이 쉬워졌다. 믹스커피의 달콤함은 잠깐의 여유와 빠른 당 충전을 해준다. 심신의 안정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최단, 최선의 의례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라면 그 안에 존재하는 나의 움직임은 로그인으로 시작된다. N 잡러 –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일할 때 메타버스 속 아바타처럼 직업인으로서 그때그때 몇 가지 설정값들이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일인가에 따라 꾸미기와 능력치를 조절해가며 가상이 아닌 현실의 공간에 적응한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거나 배울 때 로그인이 언제나 설렌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함이 몸에 배기 시작하면 로그인한 상태에서도 따분함을 느낀다. 몸은 일을 하고 있지만 정신은 잠시 유체이탈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 상태에서도 손이 움직이고 입이 말을 하며 남아있는 육체를 끌고 간다.
대부분의 일은 컴퓨터로 작업한다. 주로 글을 쓰고 문서 작성을 한다. 종종 일러스트로 그림을 그리고 포토샵으로 예쁘게 꾸민다. 한 달에 몇 번은 한 칸 한 칸 나눠진 엑셀의 작은 네모 칸에 숫자들을 정리한다. 매일매일 키보드를 두드리고 작업하며 무의식적으로 단축키를 찾아 쓴다. 무의식이라는 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자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꿈, 방어기제, 각종 신경증과 실언까지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심리학에서는 말한다. 그렇다면 의식 없이 멍 때리며 일을 하고 있는 순간에 갑자기 실행하는 단축키들은 나의 무의식까지 닿아 있단 말인가?
단축키와의 첫 만남은 기술적인 암기로 시작되었다. 우리의 출발은 다소 의식적이었지만 만겁, 천겁을 동행하며 체득되었고 마침내 무의식에 정착하였다. 언젠가 일상 속 어느 접점에서 순간의 실수도 되돌려주고(Ctrl+Z), 여러 가지 창을 띄워놓고 다른 장소로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는(Alt + tab) 능력치를 보여줄 것이라는 다소 황당한 상상으로 문을 열어본다. 때로는 이런 상상들이 고단한 현실을 버틸 힘이 되어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