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er
행복을 실행하겠습니다.
Enter
단축키는 아니지만 엔터는 그 자체로 마법을 가지고 있는 애착키다. enter라는 영어 단어는 ‘들어가다’라는 뜻이다. 들어가는 의미의 엔터는 주로 엑셀이나 회계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느껴진다. 엑셀의 각 셀에 자료를 하나 입력하고 enter를 누르면 숫자와 문자 데이터들이 자기 집을 찾아가듯 상자 안으로 차곡차곡 들어간다. 이렇게 빼곡히 셀이 채워지는 모습을 보는 나는 육각형의 벌집에 꿀이 가득 찬 모습을 보는 양봉업자의 표정을 짓고 있게 된다. 회계 프로그램에서 엔터는 저장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계정 코드와 금액을 입력한 후에는 마우스로 다음 칸을 클릭하거나 키보드 방향키 이동으로 빠져나오기보다 enter를 누르기를 권한다. 대변과 차변이 조화롭게 딱 들어맞는 완벽한 순간은 엔터키와 함께 시작된다.
일을 시작하기 위해 일터로 들어가는 나는 신속하게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다. 커피와 메일 확인 등 몇 가지 루틴을 거친 후에야 겨우 엔터가 된다. 그 몇 가지 루틴의 과정에 적절한 BGM만 깔아준다면 영화 라라랜드 오프닝 시퀀스처럼 역동적인 움직임들이 될 것 같은 상상을 해본다. 결국 오프닝이 끝난 후에는 꽉 막힌 도로처럼 답답한 일상을 실감하겠지만.
때때로 엔터는 가지고 있는 의미와 정반대의 의미를 던져 준다. 일을 갈무리하고 나오는 느낌이 그러하다. 타다닥, 타다닥 한 글자씩 써지는 한 줄의 마지막에 엔터키를 누른다. 한 줄의 문장이 여러 행으로 이어져 하나의 문단을 만든다. 문단은 각자 자기들끼리 한 편이 된 듯 끈끈하다. 문단은 다른 문단의 꼬리를 물고 한 꼭지의 글이 된다. 이번에도 ‘잘 마쳤다’ 개운한 마음으로 마감을 끝내는 소리 경쾌한 ‘엔터’.
많은 프로그램에서 엔터는 실행이다. 실행의 적절한 순간은 업무의 성과다. 체크리스트를 적어 오늘 할 일들을 계획한다. 계획한 일을 실행하고 성취까지 이어지는 일이 탁탁 들어맞으면 삶의 엔터를 즐기게 된다. 엔터는 일상보다 일에 가까운 ‘키’이다. 하지만 오늘은 잠시 엔터를 일상으로 빌려와야겠다.
요즘 나의 일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받아들이기 힘든 아이의 질병과 혹독한 치료 과정, 병간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실직, 코로나 확진으로 인한 격리까지. 한컴타자연습 산성비 마지막 단계처럼 최고 속도로 불운들이 나에게 떨어지고 있다. 대처할 수 있는 답을 누를 틈도 없이 새로운 문제들이 우두두 쏟아지고 있다. 일상은 멈추고 멘탈은 와장창 깨졌다. 참 어이가 없는 상황들이다. 내 의지로 실행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찾아야 한다.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게도 나를 위한 작은 의미 부여를 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을 버틸 수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평한 태양, 병동 14층 창문에서 보일 만큼 높이 날아오른 새의 날갯짓, 바짝 마른 입을 적셔주는 생수 한 모금. 지금 작은 행복을 실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