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나보고 가짜 남편 역할을 해달라는 거야?”
웨딩 매니저인 내 대학동기 고은이는 결혼식 하루 전날 파혼 통보를 당한 예비신부를 위해 대리 남편을 찾고 있었다. 가짜 남편까지 내세워 결혼식 강행하려는 이유는 신부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오래 암 투병생활을 해온 신부의 아버지는 기껏해야 한 달 정도의 삶이 남았다고 했다. 신부는 아버지의 소원인 딸의 결혼식을 마지막 선물로 꼭 드리고 싶어 한다고 했다. 딱한 사연은 이해가 됐지만 그래도 생판 모르는 사람의 대리 남편을 한다는 것이 깨림찍했다. 하지만 내가 막 거절하려던 순간 고은이는 나를 급하게 붙잡았다.
“야, 사례금은 들어보시고 결정해야지. 천만 원.”
그렇게 난 다음날 턱시도를 입고 신랑 대기실에 앉게 되었다. 한 시간짜리 결혼식에서 눈 딱 감고 연기만 하면 천만 원이라니, 이런 제안을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처음 마주한 신부의 모습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그 따뜻한 마음만큼이나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얀 드레스만큼 빛나는 그녀의 눈망울은 선함으로 가득했다.
“이런 어려운 부탁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난 돈값을 해야겠다는 책임감에 내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결혼식 내내 촉촉이 젖은 신부 아버지의 눈가를 보고 있으니 이 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세삼창과 팔 굽혀 펴기를 시킨 짓궂은 사회자가 원망스럽긴 했지만, 결혼식은 무사히 잘 마무리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통장에 입금된 천만 원을 은행 앱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야, 김고은. 이거 어떻게 해야 해… 자꾸 이분이 만나자고 연락을 하시는데.”
문제는 신부 아버지가 예정대로 돌아가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기적이라 말했다고 한다. 그의 몸속 암세포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건강을 되찾은 그는 사위와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수시로 오는 그의 전화에 난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미안해, 내가 어떻게든 정리를 해볼게. 이상하다, 분명 금방 돌아가신다고 했는데…”
고은이는 사과를 하며 신부 아버지의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자 그로부터 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결한 건지 물어보았지만 고은이는 몰라도 된다며 날 안심시켰다. 그렇게 다시 한 달이 지나고, 주식에 투자한 천만 원이 오백만 원으로 쪼그라들었던 어느 날, 신부 아버지로부터 한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필요하면 의사의 도움을 받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네. 부디 희망을 갖게. 남자로서 응원하겠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문자에 난 고은이를 찾아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말을 하라고 닦달했다. 그녀는 머뭇대더니 내게 사실을 말했다. 그녀의 대답은 내 머리가 아득해질 만큼 황당했다.
“… 그러니까 내가 알고 보니 자식을 만들수 없는 남자로 드러나서 이혼을 당한 거라고?”
“응…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이 최선이었어. 신부 아버지가 워낙 손주 보기를 바라시기도 했고.”
그제야 의사의 도움을 받아보라는 그의 문자가 이해되었다. 천만 원이 절반으로 쪼그라든 것도 속상해 죽겠는데, 내 정력도 쪼그라들었다니…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말이 없자 고은이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 근데 신부 아버지가 따님 이혼 사유가 따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려야 한다며… 주변분들한테 이야기를 좀 하셨다고 하네… 혹시라도 결혼식에서 마주쳤던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오해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어요…”
“야 김고은!”
그날 저녁 고은이는 길길이 화를 내는 날 달래기 위해 호텔 최고급 프렌치 식당에서 가장 비싼 코스요리와 고급 와인을 대접했다. 화가 풀릴만 하면 다시 생각이 나서 화가 나고, 다시 화가 내렸다 올랐다를 반복하는 동안 고은이는 내 화를 달래려 밤새 애를 썼다. 쉽게 누그러지지 않던 내 화는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가라앉았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 그래도 난 너 멀쩡한 거 잘 알잖아. 너 완전 남자로 멀쩡해.”
고은이는 엄마가 아이 달래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토닥였다. 와인을 두병이나 비우고서 내려온 호텔방 침대 위에서 난 내 남성성에 문제가 없음을 고은이에게 증명한 직후였다. 그것도 여러번.
“그치, 나 멀쩡하지? 넌 이제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