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서촌 산책코스를 소개합니다
1.
종로 광화문광장이 확실히 아이코닉한 요소가 있는지 엄마와 덩생님이 금요일 오후에 청계천 광장앞에 나타났다. 첫월급 탔으니 네가 쏘라는 명분인데...아들은 집에 가고 싶어...암튼 엄마나 동생님이나 좀처럼 서울에 오지 않는 사람들이기에 좀 썸띵 스페셜한 걸 준비해야 했다.
특히 모친께서는 드문 서울나들이 중에서도 종로는 나랑 몇번을 왔던 곳인데 도대체 기억을 제대로 못하신다. 엄마...여기 나랑 경복궁 야간개장할때 돌았던데잖아...아 몰라몰라 기억안나 ㅎㅎ 아들 그때 언덕 올랐던 한옥마을은 어디니??? 여기 아니니??...아니 거긴 여기가 아니구 좀 더 가야해...
나도 뭐 원래 평양냉면 먹던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집 식구들 평양냉면 먹은 적 없다구해서 <광화문 국밥>데려가서 수육순대에 냉면 두그릇 시켜서 셋이서 나눠먹었다. 여긴 한달 간 발굴한 종로맛밥집 중 하나인데 뭔가 저녁타임에 깔쌈한 한정식집 분위기여서 좋다. "뭐 이렇게 슴슴하냐"는 아주 보편적인 평냉맛평을 내린 두 혈육께서는 그래도 그럭저럭 만족했고 다음 코스를 내심 기대하는 눈치.
2.
날씨가 어째 한여름 찐득바람이 아니라 초가을 뽀송바람이 불어오는터라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 청와대 옆 샛길로해서 부암동 언덕으로 가주세요."
<필자가 보증하는 최고의 서촌산책코스>
택시/버스 타고 '윤동주문학관' 하차 -성곽길 동산계단 오름-시인의언덕-인왕산2차선도로-초소책방-수성동계곡-종로09번 마을버스 종점(러브픽션 구주월 하우스)-서촌골목-통인시장
아아...내가 이걸 깐다 여러분...
가져요 여러분 몽땅.
스물한살부터 주구장창 누볐던 서울...분기마다 한번씩 밟는 나만의 산책로.
특히 이 코스는 진짜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들하고만 갔었다.
가족이랑 같이 간 게 처음이니 오히려 늦다 늦어.
3.
62년생 호랑이띠인 모친께서도 이제 내년이면 환갑이시다. 장성한 아들딸이 수행원으로 붙었으니 의전을 해드려야 마땅함이다. (그리고 요즘 엄빠가 요즘 이걸 되게 원한다는 느낌적인 느낌느낌...다른 게 효도가 아님) 아빠없이 엄마-동생-나 셋이서 다니면 좀 외갓집 분위기가 200%가 된다. 외갓집 분위기의 가장큰 특징은 호기심에서 싹트는 호들갑이다. 세명이 나란히 걸으면 도대체 오디오가 비질 않는다.
"어머니...여기가 요즘 어머니가 그렇게 테레비로 열심히 보시는 역사예능<그날>에서 나왔죠. 김신조 일당이 침투한 곳입니다."
"오모모모모 그러니이이이? 어머머머머 순직한 경찰관이 저분이시구나(동상 앞에서 찰칵찰칵)"
"오웅!!!야 저거 집들 모냐!!! 서울집 안같고 유럽같아 지붕이 빨개x2"
"^_^자 여러분 얼른 횡단보도를 건너 저 언덕으로 오르십쇼..."
"어 야 여기 카페있냐?"
"응 카페 있어..."
"엄마는 아이스라떼!"
"야 카드 내놔 오늘 니가 다 쏴"
"^_^...(아 빨리 집가고 싶당...)"
"아들 저번에 엄마랑 갔었던데는 저쪽이니?"
"아니...엄마가 가리킨 손가락이랑 정 반대야..."
이게 산책로 들어가기 전에 벌어진 5분간의 토크텐션이다. 성곽즈음에 이르러서는 이건 뭐 마이크만 안찼지 문화관광해설사 모드가 되버렸지 뭐람...근데 항상 두 여인네들이랑 셋이 산책나오면 늘 그랬던 거 같다.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냥 내가 원고마감치느라 너무 지쳐서 그런 걸테지...대꾸 느슨하게 해도...좀 심드렁해보여도 너그럽게 봐달라고...오늘 엄마 수행비서는 좀 너한테 많이 맡기겠다고 동생님에게 양해를 구함.
두 사람다 지적 호기심까지는 안가도 하여튼 뭐 둘러보고 다니면, 뭔가 자기만의 관찰력과 시선 같은 게 있어서 대화가 마르질 않음. 생각해보면 똑똑하셨던 외할아버지도 그러셨던 거 같고...집안 내력인듯. 그걸 극대화한 게 나...ㅎㅋㅎㅋ
4.
이 산책 스테이지의 백미는 수성동 계곡 내려가기 전에 약간 시선을 틀어야 발견할 수 있는 조망데크. 한여름 한밤중에 가면 서울시내 야경을 파노라마처럼 구경할 수 있는 스테이지다. 처음 발견한 건 14년이었나...고딩동창인 호정이랑 통인시장에서 엽전도시락 까먹고 소화시킬겸 올라왔던 거 같은데... 그 이후로는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 데리고 오는 히든 스팟이다.
나무에 가려지지 않아 풍경이 근사한데다...묘하게 조용한 구석이 있어 야경보며 얘기하기 참 좋은 곳이기 떄문. 작년 5월, 생일을 맞이한 친구 Y와 걷던 게 마지막이었던 거 같은데 1년만에 다시 온 것. 여름에 오니 확실히 모기가 많아져서...4~5월이 최고로 좋은 곳인 거 같다.
5.
자. 이 다이얼로그를 기록하기 위해서 남기는 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서촌 골목길에서 운을 틔웠다.
"이 동네는 아직도 태권도학원 봉고차에서 인사하고 뛰어내리는 애들 볼 수 있어서 좋아"
동생님이 받아친다.
"나 오후에 테니스치러 갔다 돌아오는데 앞에 초등학교 있단 말이야."
"ㅇㅇ..."
"근데 애긔들 둘이서 막 이렇게 인사한다?! 내가 사랑해애애애애애애애~~~ 인사 받는 애는 더 난리야...내가 더 사랑해해해해해해해애애애애애애"
"ㅋㅋㅋㅋㅋ둘다 서로 질수 없뜸???"
"ㅇㅇ...ㅋㅋㅋㅋ 그러더니 자기네들끼리 미리 맞췄나봐. 막 손뼉 어깨 마주치고 난리치더니 헤어졌어. 보는 내가 행복해졌어."
나는 그걸 이렇게 억양까지 흉내내서 따라하는 널 보며 행복해 동생아.
여기까지 말하니 모친께서 자기 회사동료 에피소드 섞는다. 어른들도 친한 사람들끼리 어떻게 호들갑떠는지를 보여줘서 다들 미치도록 웃었는데...우리집 중전마마의 체통과 위엄을 감안하여 기록하지 아니하기로 한다. 하지만 영상기록은 남겨놨으니...평생 기억될 장면이긴 할 듯...
6.
인사로 "내가 사랑해"를 발사하다니. 이런 천진난만함이 아이들에게 있고 어른들이 그 맑은 모습을 좀 더 늦게까지 유예시켜줘야 하는거야. 진짜 숨만쉬어도 사회생활에 찌들어가는 서른살 직장인의 허파를 맑게 하는 다섯글자에 세상발랄한 억양이여서 좀 오래 여운이 남는다.
거기에 "나도 사랑해"라고 받아치는 건 두배로 중요한 거 같다. "나도 사랑해"라고 스스럼없이 받아칠 수 있는 사람을 나는 곁에 몇명이나 두고 있나. 일단 우리 가족 옆에 두고 있는 건 확실한데!
"나도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상태를 추구하자고...또 그런 사람을 곁에 한명이라도 더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21년 6월 마지막주 금요일의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