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일기 (1)
밤공기가 선선하다. 오늘은 서른 두번째 생일. 내친 김에 석바위 유석권 산부인과 건물 앞까지 다녀와도 좋을 것이다. 산부인과는 진즉 사라졌지만, 건물은 여전히 남아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병원 뒷뒷 건물부터 싹다 헐렸다. 최근 고향동네는 재개발이 한창이다. 동네 일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얼마전 헐린 재개발지구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살던 인천 주안식 이층 양옥집이 있었는데...이제 그 모습은 두 부부가 낳아 기른 세 자매의 사진첩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세 자매의 막내가 낳은 아들이 나중에 세 자매의 사진첩을 모두 아카이빙할 것이다.)
석바위 유석권 산부인과는 8차선 도로 앞 건물인탓인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아파트단지 공사인부를 위한 함바집으로 용도를 바꿨다. 용도는 바뀌어도 공간은 그대로 남는다. 공간만 살아있으면 그만이다. 형태는 바뀌기 마련이다. 석바위 유석권 산부인과 건물은 내가 태어난 공간 근처에서 그럭저럭 잘 먹고 살아왔음을 환기시킨다.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석바위공원'을 가로질러야 한다. 석바위공원. 지명에 돌이 무려 두개나 들어간다. 아스팔트로 덮이지 않은 낮은 언덕이다. 큼지막한 발걸음으로 오십보쯤 걸으면 굵직한 화강암반이 노출된 정상까지 성큼 다가설 수 있다. 말그대로 돌돌돌 바위바위바위 석바위. 쿠션감 좋은 산책로 궤도를 살짝 벗어나면, 비탈진 돌무더기 따라 공원 둘레길 쭈욱 따라 걸을 수 있는데 오래된 나무가 많고 곧바로 황토흙길이 나와 걷는 재미가 있다. 혼자 걸어도 좋고, 가족이나 친구랑 걸어도 재밌게 걸을 수 있다. 얼마전에는 공원 옆 빨래방에 수건 잔뜩 실어와서 40분 코스로 돌려놓고, 산책로 서너바퀴 돌며 동생님이랑 얘기하는 게 참 좋았다. 남매의 여름밤, 남매의 넋두리, 남매의 속사정. 뭐 그런 것들.
30년 가까운 세월을 이 근처에서 보냈다. 어렸을 땐 매미 잡겠다고, 커서는 도서관 가겠다며 무시로 지나다니던 곳이다. 요즘 들어서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 많아서 재밌게 관찰하고 있다.
최근 여기서 실시하는 나만의 리추얼은 한밤 중에 공원 정상에 올라가 정밀아의 <서시>를 듣는 것이다.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는 늦여름밤, 커다란 고목 사이로 이파리를 흔드는 나무를 바라보며 고개를 쭈욱 빼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 상태에서 <서시>를 크게 틀어 듣고 있으면, 윤동주가 스케치하고 정밀아가 덧칠한 서시의 세계가 추상이 아닌 감각가능한 형태로 전환된다.
"나는 오늘의 나를 살 것이라!"라고 읊조리는 가사를 같이 따라해본다.
그것은 특히 새로 한주를 시작하는 일요일 밤에 가장 좋은 기운을 불어 넣어준다. 수년 뒤면 이 공원 앞뒤로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설 것이다. 한밤 중에 공원을 누리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고요를 즐길 수 있을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고향을 떠나는 게 먼저일지, 고향의 고요가 깨지는 게 먼저일지 아직은 모르겠지만...시한부 행복이란 걸 알게 됐으니 있을 때 부지런히 즐길 따름이다.
#감각의일기 를 적어봅니다. 풋내기 에디터가 일을 일답게 해내기 위해 채택한 미감美感향상 솔루션입니다. 최선을 다해 감각하고, 감각을 나만의 시선으로 재현하려 애쓰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크리에이터의 밥줄은 유일무이한 통찰력에 달려있고, 그것은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힘에 달려있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