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뉴요커(The New Yorker) 잡지에서 코로나 사태를 흑사병 유행 (블랙 데스)에 비유하는 기사를 읽었다. 로렌스 롸이트가 존 홉킨스 의학 역사학 교수 지아나 포마타 (Gianna Pomata)와 스카이프에서 화상 인터뷰를 다룬 기사였다. 포마타 교수는 코비드 19 사태를 유럽을 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에 비유했다. 이태리 사망자가 중국을 넘어 미국 다음으로 최고치에 달했을 때 뉴스에서 접한 이태리 군인들이 비통하는 가족도 없는 이름 없는 관을 옮기는 영상을 뉴스로 접했던 나는, 그 장면이 회상돼 잠시 몸을 떨었다.
기사를 읽는 데 볼로니아에 돌아가 격리를 하고 있는 포마타 교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중세에 대한 이상적인 회상은 안 해. 지금 관 수거를 위해 이태리 군대가 나섰 듯, 중세 때 길마다 시체가 쌓여 있었지.”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의 원인이 부패한 공기가 문제라 여겨 강력한 방향제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죽음의 공기로부터 의사를 보호하기 위해 등장한 특별 두건 (그림 1)은 기다란 코 부분은 방향제를 넣을 수 있게 부리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당시 유럽은 기독교 중심의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있었기에, 전염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벌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기도와 금식에 의존하기도 했다.
이 전염병은 스콜라 철학 사상이 기본 체계였던 당시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 스콜라 철학은 1-8세기경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철학에 기초한 세계관으로, 일반적인 철학적 탐구와 인지 그리고 인식의 문제를 신앙과 결부시켰으며 절대자 아래에서 인간의 이성을 설명한 철학이다.
‘스콜라’는 라틴어로 ‘학교를 뜻한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 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본 사상으로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치 등 근세 고전 철학자들이 큰 영향을 받았다. 전염병으로 인해 학자들은 무거운 철학보다 경험적 증거가 뒷받침된 학문에 더 주목하기 시작했고, 상식이 통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설명을 들으니 비로소 왜 흑사병 뒤에 르네상스가 등장했는지 역학관계가 더 잘 보인다. 르네상스 뜻 또한 Remake -할 때 Re 접두사에 birth 탄생을 뜻하는 naissance 가 합쳐진 말이고, 그림 속 인간이 중심이 되어 다시 태어나기 시작한 미술사로 전반에는 과학과 실용 학문이 깊숙이 연결돼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후의 문화예술은 어떻게 전개될까. 이렇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듯한 소용돌이 속 어떠한 문화예술이 필요할까.
슬리퍼스 써밋에서 기획하는 벨롱벨롱나우 페스티벌은, 제주도에서 열리고 문화예술진흥위가 후원하는 신나는 예술여행 사회문제 해결형 사업이다. 이 기사는 이 코로나로 인해 겪는 어려움에 대한 기사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흑사병이 세계관을 뒤엎고, 그 시체 더미 위에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 듯, 우리는 이 아수라장 속에서 어떤 예술을 다루고 어떻게 이 값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가 우리의 고민인 것이다. 2020년, 모두가 허리를 졸라매는 상황에서 항공사 후원은커녕 외국에서 한국 입국 시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쿼런틴 제도로 인해 여러 차질을 겪고 있다.
해외에서 오기로 한 여러 발제자들이 2주간 격리가 있으면 한국을 갈 수 없다 통보했고(당연히 이해한다), 여러 행사를 하는 미술관과 극장은 확답을 줄 수 없으며, 제주도에 가는 것도 행여 해가 갈까 조심스럽다. 영국발 한국 항공료는 두배가 됐으며, 9월 항공도 취소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원래, 10월 말 행사를 위해 10월 초에 입국 예정이던 나 또한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이태리 건축가 마리아 질론나의 상황을 고려해 입국 일을 9월로 당겼다. 마리아는 양쿠라 작가와 함께 디자인하는 건축물을 위해 일찍 가야 하는데, 한국말도 못 하고 아무도 못 본 채 2주 쿼런틴을 작은 방에 혼자 보내게 하기는 너무 가혹하다 느껴 나의 일정을 그에 맞췄다. 문화행사도 좋지만 작은 방에서 2주를 혼자 보내기에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았다. ‘쿼런틴’ 단어가 흑사병이 만무할 때 이탈리아 전역에서 유행병 환자들을 마을 밖 나병 수용소에 격리하고, 출입하는 물건을 1397년부터 40일 (quarantenaria) 격리하는 제도에서 나왔다니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생각을 바꾼 순간, 내가 언제 2주간 작가 바로 옆에서 쿼런틴을 하며 이를 영상으로 기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우리 페스티벌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요즘 나는 어떤 페스티벌이에요? 이 상황에 할 수 있어요?라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는데, 우리는 무조건 Go!이다. 페스티벌의 참여 작가들은 한국 고유의,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던 건축, 철학, 전통문화가 어떻게 눈앞에 값싸지만 환경에 안 좋은 재료로 바뀌며 파괴되었는지 살펴보고, 이는 결코 긴 타임라인 속에서는 좋은 해결책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하는 등 벨롱벨롱나우 페스티벌 안에서 다양한 화두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지금도 한국에서 전화가 왔는데 내주에 촬영 및 사전 답사 일정으로 슬리퍼스 써밋의 기획자들이 제주도에 갈 예정인데, 밤새 제주도 확진자가 늘었다고 한다. 우려가 되지만 그래도 확진자가 나온 곳이 우리 일정이 있을 학교와는 반대 방향이라 방언 채집 및 인터뷰에 지장이 없으리라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나는 흑사병이 도달했을 때 이를 피해 피에솔레 언덕에 모여든 젊은 남녀 10명이 이야기를 푼 데카메론 (그림 2)을 떠올렸다. 이들은 매주 5일, 2주일에 거쳐 10일 동안 100편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이 모여 그리스어로 10이라는 뜻이 담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라는 고전이 되었다.
우리 벨롱벨롱나우의 이야기도 다양한 회의와 이야기들도 기록될 것이다. 보카치오가 다시 영국 작가에 의해서 다시 해석된 모습을 찾다가, 존 윌리암 워터하우스의 해석을 찾았다 (그림 3) 그가 100년 전 살았던 집은 지금 영국 집의 바로 앞이다. 그렇게 긴 시간 속 인간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림은 영원하구나. Ars Longa Vita Brevis!
반짝반짝 이란 제주도 방언 ‘벨롱벨롱’과 지금을 뜻하는 영단어 Now와 붙여 ‘벨롱벨롱나우’를 작명했을 때 의도가 있었다. 그 의도를 앞으로 3주에 걸쳐서 <김기대 & 맥스아로셋>, <양쿠라 & 마리아 질로나>, <200일의 항해와 남극의 소리> 3가지 페스티벌 속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 벨롱벨롱나우도 지금처럼 영원히 빛나길.
김승민 큐레이터, 슬리퍼스 써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