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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May 14. 2024

むすび。

정서윤


むすび。


"태양이 , 달이 지나가지 않더라도 꼭 지켜야 하는 게 있어." 어느 날 친구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그게 뭔데?" ".... 그건 바로.. 무스비야." 처음에는 그 친구가 너의 이름을 본 지 얼마 안되어서 하는 그저 "애니 따라하기"를 하는 줄 알고 가볍게 넘어갔었다. 적어도 우리 학교에서는, 무조건 일주일 전 본 영화의 캐릭터를 하나 정해서 그 컨셉으로 살아가는 놀이가 유행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식빵을 물고 오거나, 나루토 춤을 추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이젠 조금은 지쳐가려는 찰나, 그 친구까지 그런 말을 하길래 이젠 일상이구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던 경험이 아직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는 그렇게 스쳐갔던 것이었지만, 어쩌면 그 친구는 그날의 그 말에 다른 의미를 슬쩍 담았을 지도 모른다. 너의 이름은 어쩌면 끔찍한 재앙을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사랑을 다루고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바로 같은 사건, 다른 경험이다. 같은 재난인데 누군가에게는 혜성인 것처럼. 그 혜성은 어쩌면 끔찍한 운석충돌이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이었을지도. 벌써 이토모리에도 혜성이 지난지도 8년. 숫자와 정보들로 잊혀져가는 과거의 현실이지만, 미츠하와 연결된 것들이 어쩌면 타키에겐 희미하게도 남아있었다. 이제 그는 미츠하를 아는 순간, 티아마트 혜성은 아름다운 혜성이 아닌 그저 끔찍한 재앙의 혜성일 뿐. 사실 그 안에서도 어쩌면 빨리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이토모리는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소수는 갑자기 찾아온 그들을 재난으로 믿고 영원히 혐오할 테지만 다수는 그와 다르게 그저 두 갈래로 갈라졌던 아름다운 혜성으로 기억한다. 그렇다, 다수는 소수를 기억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어쩌면 연결, 인연을 주로 다루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무스비."(むすび。) 맻다, 매듭짓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작디작은 단어는 생각보다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어디서 주운 돌멩이라도, 생활속에서 가끔씩 눈에 스치는 물건도 누군가가 생각나는 것처럼. 주름진 커튼을 볼 때. 돌아가신 왕할머니의 첫 번째 만남에서 보았던 손등의 쭈글쭈글한 주름이 생각나고, 어쩌면 고래를 보니, 스쿠버 다이빙에서 고래와 스치며 잠시 동안 중지손가락에 영광의 상처가 났던 기억도 생각난다. 이렇게 난 겪었던 게 많았었는데. 이제 나도, 미츠하도, 타키도 알아버렸다. 좀 늦게 알아버린, 우린 과거에 무언가를 정했다는 사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예를 들어 엄마가 어릴 적 알려주는 머리 묶는 법이라도, 어쩌면 작디작은 물건 하나가, 말 한마디 하나가 사람을 연결해주는 요소가 되었다는 걸. 어떤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이 생각나는 것 처럼, 그 사람이 생전 했던 말이 잠깐 팅 하고 스쳐가는 것 처럼. 타키를 보면 이제 카페가 생각나고, 잠시 나무를 뽑아 테이블을 만든 시골 슈퍼, 카페라고 부르기도 초라한 곳에 있던, 유카타를 입고 단발을 하고 있던 미츠하의 모습은 잠깐 잊고. 타키는 선명한 오렌지색 머리끈이 떠오를 것이다. 처음 느껴보는 여자의 감촉과 여러가지 시골의 알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것들을.


이제 세상은 연대를 중시하기보다는 어쩌면 우리의 이익을 중시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하고, 주변 사람들과의 말수를 줄인다. 이것이 바로 "일상의 식민지화" 누구나 일을 하느라 이야기할 수 없는 날. 살아가는 게 의미 없는 날. 그때 책 모모에서 모모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지냈다.일에 찌들려있는 사람들을 기꺼이 집 안에 맞이하며. 그래서 모모는 과거를 기억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일상의 식민지화를 추구하던 회색 신사가 들어오기 전에 그녀와 이야기하며 미소를 짓던 모든 사람들을. 다수는 소수에게 생겼던 재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어쩌면 그것 덕분에 이토모리는 영원히 잊혀진 폐허가 되었다.


사실 이젠 흔히 말하는 "자연재해"도 재난이라고 말할 수 없다. "태풍이나 지진은 재난이 아니다. 지금의 재난은 외로움이다." 우리는 왜 살고, 왜 우리 인생에서 걸림돌이 되는 "좋은 친구"를 만들지 못해서 난리일까? 어쩌면 정말 지금은 비대면 사이인데. 이젠 왜 속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이 없는지도 알 것 같다. 미래를 준비하는데에 나의 친구 아니, 그 아이는 나를 주저앉게 하는 라이벌이라는 존재에 불과하니까. 우리는 스몰토크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이 현상들이 지금의 재난. 유튜브 인스타, 꾸그 등등..


지난주 금요일에 서울에 갈려고 택시를 탔었던 적이 있다. 처음부터 텐션이 장난이 아니었던 택시 기사님은 서울역에 가는 40분간 우리에게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곳 40분간.. 참 많은 걸 배워가서 좋았다. 어쩌면 그저 우리에게 스쳐가는 존재이지만, 국밥집을 지나가며 장사가 잘 되는 국밥집 옆에 울고있는 또 다른 "신창국밥"집의 밖에서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울고 있던 한 직원을 슬쩍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누가 보아도 시골인 가게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저 사연있는 오랜 세월의 풍파를 맞아 더 이상 웃을 수 없을 것 같은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만이 계단 사이에 걸터앉아있을 뿐이었다. 그저 지나가는 가게들 중 불이 켜진 가게는 단 1개 뿐. 나머지는 다 검은색이었다. 물론 할머니가 앉아있는 가게도.. 검은색이었다. 더 이상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가게는, 이제 모든 소식이 끊겨 버렸다. 입담이 좋은 택시기사가 하는 말은 어쩌면 자신의 회사에 대한 홍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빛처럼 빠른 속도로 스쳐갔더라도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은 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된다. 자연스럽게 하이패스 돈을 걷는 사람에게 천원짜리를 바톤 터치하듯 토스해주고, 다시 쿨하게 운전을 하는 모습이 정말 매력있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안들리고 서로의 촉각이 안 느껴지고 서로의 눈빛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서 유일하게 느낀 행복한 이야기꾼이었다. 그마저인 40분의 스몰토크도 아빠는 쉬고 싶었고, 귀찮아했다. 물론 나도 자고 싶었는데. 어쩌면 내가 애늙은이가 되었나 보다. 이젠 여러가지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기보단, 세상에 있는 모든 작디작은, 어쩌면 개미만큼 작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물론 이 모든 세상에서 IT 와 SNS 를 단절함으로써 진정한 연결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 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무스비도 정말 소중한 존재였지 않을까 싶다. 너의 이름을 본 그 친구가 말했던 것 처럼, 난 이제 신창국밥의 내일과 사연 있어보이는 할머니의 삶이 정말로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끝도 없는 칸토아의 시간대에 묻혀 사라지기 일보직전인 나의 기억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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