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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Jun 03. 2024

NPC


손정원


NPC


우리가 갖고 싶다고 갈망하는 것은 수도 없이 많다. 나는 일본땅을 갖고 싶었다. 왜냐하면 일본의 애니 문화와 발달되어있는 오타쿠들의 전통이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영생이라면, 나는 육체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생각만 하는 공과 다름없는 존재. 우리에게 신체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감각이 있다.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육체가 없다면, 나에게는 애니를 볼 눈도, 들을 귀도 없다. 오타쿠의 문화를 할 몸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하지 못한 채 영원히 계획 단계에 머물러 있다. 영생은 재미없다. 나의 욕망과 욕구는 하염없이 올라오지만 실행할 수 없다. 그래서 의미가 없다.

영생은 아름답고 완벽한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유롭지도, 활기차고 희망에 차 있지도 않다. 오히려 영생을 사는 우리는 영생을 바라지만 말이다.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언젠가는 썩어 죽는다. 그것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숙명이다. 하지만 이 육체는 우리에게 감각을 준다. 따라서 우리은 생각하고 자아가 존재한다. 직접경험을 통해 지혜가 쌓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뜨거운 코코아를 먹고 그 코코아에 혀를 데인 후 조심하고, 라면을 먹다가 맛있으면 우리는 라면을 더욱 좋아하게 된다. 이렇게 직접경험은 자아를 구성하는 기본 바탕이 되고, 그것은 나아가 나의 마음과 의식이 되어 나의 본질이 된다. 동일론에 의해 우리의 의식과 몸은 함께 간다. 육체의 가치는 육체 그 자체에 있다. 육체를 가진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생각하고 결심하고 실행할 수 있는 몸이 있기 때문이다. 영생은 몸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부패하거나 썩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박제되었듯이 존재한다. 그들은 생각하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마치 전신 마비의 환자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은 재미없고 따분하다. 애초에 그들은 재미를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박제된 그들은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시원한 여름바람이 없고 밤하늘의 별이 수놓인 황홀한 하늘을 볼 수 없고, 발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바다모래의 감촉도 느낄 수 없다. 인간으로서 살지 못한다. 하나의 인격체로서 살지 못한다. 그들에게 자유는 없다. 영원한 생각의 늪에서 뇌를 정지시켜줄 것이 없다.

기계는 인간과 다르다. 언뜻 보면 그들에게도 그들 고유의 몸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육체가 없다. 그들은 영생과 같이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은 없이 코딩된 대로만 행동한다. 다른 말은 하지 못하는 NPC처럼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다. 기계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종이에 베인 상처의 아픔도, 음식을 먹었을 때의 포만감도 느낄 수 없다. 인간과 유사하다고 생각해봤자 그것은 잘 짜여진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했다. 영생을 하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래서 욕심도, 욕망도 없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 몸이 없는 그들에게는 어떤 것도 소용이 없으니까. 그들은 같은 자리에 영원히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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