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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Jun 16. 2024

조그만 먼지

조그만 먼지


정서윤


사춘기는 누구에게나 온다. 누군가에게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심지어는 삐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도 그렇다. 자아는 누군가에게 맡기며 마음대로 정하라 할 수 없는, 그런, 참 귀찮은 존재이다. 사춘기가 오면 저절로 예민해지고 부모님과 싸움이 잦아지기 마련이다. 나 같은 경우는 눈물이 많은 경우로 발전하였다. 나도 이런 내가 정말 짜증나서, 미워서 계속 날 질책하고 미워했었다. 언제나 엄마 아빠는 한결같이 똑같았고, 할머니도 그랬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에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우린 오늘 방학 때 할 일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3주 안에 문제집을 7권 정도나 떼겠단 말에 정말 놀랐다. 긴 협의를 한 결과, 결국 난 내 진로를 얘기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엄마 아빠는 내가 특목고를 가기를 원하는 것 같다. "특목고 4등급이랑 일반고 1등 중에 뭐가 더 높은지 알아? 특목고야." 그렇게 말하면, 일반고에 가겠다는 내 의지는 점점 잦아들어갔다. 우리 엄마는 좀 특이하게도 불편한 대화가 끝난 직후에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다. "더 하고싶은 말 있니?" 그때 난 항상 "없다"라고 답한다. 이 답답한 대화를 끝내기에 가장 짧은 단어이자 어차피 또 이상한 소리 한다고 말할 거, 그저 마음의 문을 닫는 게 더 나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힘든 일이 있으면, 엄마 아빠한테 말해" 힘든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 말하고 풀 수 있겠지만 왜 그들은 이런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요즘 엄마는 내 인생의 최대 적이다. 그녀와는 말만 하면 요즘은 거의 싸움이다. 물론 나도 엄마가 착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다른 엄마들에 비해. 아빠와 싸웠을 때는 무조건 엄마가 좋았다. 그런데 난 엄마 앞에서 이성을 잃을 때도 있다. 엄마는 물론 착하게 말했을 수도 있어도, 나에겐 상처인 말이었다. 엄마도 상처를 받았냐고 물어보면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난 전혀 상처를 안 받는데?" 그녀는 상처를 받지 않는 반면, 난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난한다. 근데 가끔은 편하기도 하다. 여기서 내가 더 내려갈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짜증나는 일이 있어도 언제나 참는 내가 너무 좋았다. 가끔은 울고 속사래를 치며 혼자 있고 싶어하는 내가 너무 짜증나 마구 때려보아도, 결국 감정의 화살은 엄마에게로 날아갔다. 엄마는 언제나 사실을 중요시한다. 언제나 결론을 마무리 지으려 나에게 그런다. 어떨때는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임에도, 가장 짜증나는 어떤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놈의 사실, 사실, 사실. 짜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 듯 보였다. 이렇듯 난 언제나 굴욕적이게 엄마와 대화를 마치고 나 언제나 방에 틀어박혀 죄 없는 인형들을 방바닥에 모두 던져 찌부로 만들곤 했다. 언제나 지는 존재는 나였고, 언제나 대부분의 비율로 사과하는 쪽은 나였다. 엄마는 이 모든게 나의 문제라고 한다. 숙제를 안한 것도 내가 미뤄서 그런 거고, 언제나 내 잘못이고, 언제나 또 내 잘못이다. 그러다 보니 난 더 이상 의지할 존재가 없어져버렸다.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다. 언제나 엄마는 내 말과 눈물을 예상하고 있다. 어루만지고, 달래줘야 할 내 마음을 엄만 차갑게 식히고 찌르고 있다. 엄마와 담판을 쌓아보아도, 손절리스트에도 적어보고, 엄마의 모습을 그려도 보고, 마주 던지고 찢어보아도, 뒤에서 엄마를 비난도 해보았지만 내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내 자아의 안은 거의 불안이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내 옆에는 빙봉인 뽀로로가 아닌, 식은땀과 거친 심장 박동이 내 옆에 있어주었다. 이쯤 되어서 내 빙봉 이야기를 해줄까 한다. 조금 늦은 나이이기도 하지만, 내 빙봉은 뽀로로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지금도 나의 현재 빙봉이 뽀로로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빙봉인 뽀로로를 시도 때도 없이 찾는다. 예를 들어 엄마와 다투었을 때, 누군가 나의 편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을 때, 내가 기쁠 때나 화날 때나 슬플 때나 뽀로로는 언제나 내 옆에서 같이 있어준다. 하지만 난 주로 화날 때 찾는 듯 하다. 티비 안에서 항상 웃고 있는 뽀로로가 나만의 빙봉이라고 생각하면 생소하지만, 티비 안에서, 인형 안에서 항상 웃고 있는 뽀로로를 보면 웃음의 전염성이 있던 지라 같이 웃었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어린 나는 그 한 문장을 자연스럽게 동경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를 빙봉으로 정한 것 아닐까. 난 그와 같이 매일 있었고, 그도 나와 같이 있는 게 당연하였다. 마치 이어진 실처럼 언제나 함께였고, 같이 웃어야 했고, 같이 슬퍼야 했다. 항상 변하지 않는 뽀로로의 표정을 보며 그 아이는 진정 나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아이는 그 아이들의 친구가 있다. 난 그저, 방에 틀어박혀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는, 한 방향의 친구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나와 같이 있어주는 유일한 은신처였다. 가끔은 잔소리라는 이름의 무기로 날 힘들게 만들지만, 정말 행복한 부녀로써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아빠는 큰 곤경에 처해 있을 것이다. 사춘기 딸의 감정선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굉장히 복잡한 감정선을 나도 찾을 순 없다. 내가 울면, 그는 묻는다. "왜 울어?" "도대체 우는 이유를 모르겠어" 나도 모른다. 그냥 어쩌다 보니 나의 눈물샘이 터져버린 것이다. 날 이해 못한다고 말한 아빠의 가시박힌 말에,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아빠의 말에 다정다감한 "왜 울어"라는 그 한마디에도 난 눈물을 훔치며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며 돌아선다. 난 곧 넘칠 물컵이다. 조금 건드려도 쓰러져 내 안에 담긴 물을 당장이라도 쏟아버릴 불안한 인간이다. 난 그래서 더 이상 그치지 않는 눈물을 안고 내 유일한 안식처, 화장실로 달려갔다. 세면대를 틀어놓으면 언젠가는 내 울음소리가 묻혀 아무에게도 내 울음이 들리지 않았으니까. 분명히 엄마 아빠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 날 낳았는데, 날 왜 이렇게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난 이젠 불안할 때만 가끔 찾는 뽀로로도 오늘은 옷장 안 깊숙이 던져버렸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나눴던 빛 바랜 그의 몸통을 감싸안으며. 하나뿐인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내려니 정말 마음이 아팠지만, 이것이 최선책이라는 내 말에 난 그를 옷장 깊숙이 넣고 문을 닫았다. 난 이제 더 이상 이런 사적인 일로 고민을 토로하고 싶지 않다. 이런 불편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도 이젠 그만하고 싶다. 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나에게 이렇게 재촉하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이렇게 말하는 모든 것들이 오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빗방울에 다 씻겨 내려가 버리면 좋겠다. "그대는 선물입니다. 하늘이 내려준, 홀로 선 세상 속에 그댈 지켜줄게요" 날 지켜줄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심심찮은 변명은 이제 하기도 지쳤다. 오늘도 불안은 다가오고, 전혀 즐겁지 않은 하루였다. 그래도 난 아직 그들의 차갑디 차가운 손을 꼭 잡아줄 수 있다. 비록 마음의 문은 닫히고, 더 이상 내 고민을 이젠 말하지 못하며 울 수 밖에는 없지만, 아직까지 난 조금이나마 따뜻한 온기를 그들의 손에 전해주려 한다. 이렇게 불편한 사람의 단점을 열거하다 보면, 기분은 정말 좋아지기 마련이다. 난 그래서 계속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도 다 이런 것일까? 아니면 나만 이렇게 우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적으로 인정을 받아보아도, 그 일에 대한 내 생각에 대하여 인정을 받아보았지만, 한 번도 인정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 바로 내 마음이었다. 잔뜩 상처를 안다 못해 따끔한 소독약까지 견딘 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불안함이 계속 밀려오면, 어쩌면 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기도 하다. 어딘가로 떠나버리고 싶기도 하다. 우리는 불안에 집중하지만, 내 옆에는 생각보다 많은 감정이 있다. 기쁨, 슬픔, 부럽, 따분, 분노, 까칠 등.. 여러가지 감정들이 날 이루고 있는데, 왜 난 이렇게 불안만 느끼며 살고 있을까? 나라는 나약하고 초라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살면 안돼, 난 사라져야 돼. 이렇게 모진 말을 내뱉으며 난 오늘도 다시 옷장 안에서 인형을 꺼낸다. 나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누군가 나에게 행복해도 된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인스타에서, 카톡에서 보는 사람들은 전부 다 행복하고 멋져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서 난 결국 먼지가 되었다. 너무 작아서 사람들 눈에도 보이지 않는, 그런 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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