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보는 장소는 왠지 모를 호기심과 묘한 기분이 든다. 내비게이션을 더 뚫어져라 보고, 평소에 익숙하지 않은 장소는 설렘과 긴장감을 동시에 준다. 지금 혼자 제주도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는데, 정확히 여기가 어디인지 잘 모른다. 길 따라가다가 들어가고 싶은 곳에 들어가고 쉬고 싶은 곳에 쉬는 휴가를 다니고 있다. 원래 블로그 검색도 잘하지 않은 터라 어디가 좋고 멋진 곳인지는 잘 모르고 관심이 없다. 행여 알아낸다 하더라도,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라 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오히려 간판도 기억나지 않는 곳을 그냥 들어가고 메뉴도 아무거나 시켜서 먹고 있는데 나름 맛있다.
혼자 다니는 여행이 처음이 매우 어색하고 낯설 것이라 생각했지만, 식당에서 2인분 음식을 못 먹는 점만 불편하고 그밖에는 대수롭지 않은 듯하다. 무엇보다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너무 만족한다. 처음에는 막연히 프리다이빙을 하러 무작정 떠나왔지만, 정작 파도와 너울 때문에 바다에 못 나가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거나 짜증이 나질 않는다.
특별히 뭐 하는 게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더 좋은 추억과 기억을 만들려고 애를 쓰지 않는 내 모습이 더 편안함을 준다. 쫓기듯 살아와서, 무엇인가 실적을 내야 했던 나로서는 그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하루가 너무 감사하고, 평온하다.
어렸을 적에는 호르몬 과잉기 시절답게 극적이고, 강한 자극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는 훈련을 하는 것처럼 정말 가만히 있다. 물속에 긴장을 빼고 호흡을 멈추는 프리다이빙의 세계에서는 누가 더 호흡을 많이 참고, 더 깊은 수심을 향해 내려가는 게 다가 아니다. 고요함 끝에 아무 정적소리도 들리지도 않을 때 비로소야 내면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다. 또한 내 숨소리에 더욱 집중해서 풍경보다 나의 내면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나를 살게 해주는 심장소리와 숨소리에 그토록 무관심 했다니 너무나 미안하고 안타깝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숫자에 연연하는 삶을 살아왔다. 아니 우리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놈의 “숫자”에게 지배를 당하고 살아왔다.
본디 이 숫자라는 놈은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더 많이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낸 세금 계산기에 불과하다. 하긴 인류 최초의 문자의 내용도 연애편지가 아니라 세금을 걷기위한 명세서 였다니 낭만과는 거리가 먼것이 분명하다. 이 숫자는 우리의 삶의 깊게 들어와 모든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더 많은 연봉과 더 비싼 것, 더 빠르게, 더 많이, 혹은 더 정확하게 말이다. 물론 숫자는 사물과 대상에 가치를 측정하는 가장 간편한 도구이다. 흔히 키가 몇이세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등의 질문은 상대방을 혈액형으로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의뢰 물어보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숫자만큼이나 환영을 받는 문자도 없다.
프로선수들은 자신의 연봉으로 가치를 증명하고, 자동차 회사는 엔진의 크기와 속도로, 물류회사는 배송 속도로 , 사장님과 알바는 매년 최저임금으로 이해를 달리하고 학생들은 수능 점수로 미래가 달라진다. 페달을 멈추면 서버리는 자전거처럼 끊임없이 경쟁하고 성장해야 하는 세상에서 숫자를 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회수가 높은 영상이 좋아요가 많이 달린 사진이 과연 좋은 사진일까?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게 과연 나한테도 맞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곳은 비싸고 근사하다. 하지만 비싸고 근사한 게 나랑은 맞지 않을 수가 있다. 와인과 스테이크와 분명 삼겹살과 소주보다 비싸지만 내 입맛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물며 음식도 그러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고액 연봉을 주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낫다는 기준은 오로지 “숫자” 밖에 없다. 나머지의 가치는 알 수가 없다. 숫자는 가장 간편한 도구이지 정확하고 나의 마음을 읽는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다.
류현진의 연봉보다 적게 받은 프로 선수의 노력이 결코 적은 게 아니다. 물론 끊임없는 노력에 대한 성과와 보상이 연봉임에는 틀림없지만, 다른 선수가 더 땀을 덜 흘린 게 아닐 수 있다. 세상은 승자의 역사만 알려주고, 가르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숫자를 대신해서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라도 사람보다 호불호가 갈리듯이, 나와 남의 취향과 가치관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살아온 환경과 기질을 무시할 수 없고, 문화와 습관은 자신만의 잣대가 되어 남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숫자가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것이, 내가 나에게 말하는 내면의 속삼임이라 생각한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 “man in the mirror” 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거울 앞의 나의 모습을 먼저 바꾸라는 가사가 있다.
나를 마주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만날 때 감쳐둔 욕망의 허용치를 둘 수 있고 허용치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관대해질 수 있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나의 그 찌질하고 처절한 실수와 치부를 있는 그대로 마주 칠 수 있을 때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변한다. 그러면 더 이상 남들이 정해 놓은 기준은 “숫자”에 끌려다니지 않고 무엇을 하든 당당한 내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내가 먹었을 때 맛있는 음식이 진짜 맛있는 음식이고, 내가 봤을 때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황금비율이라는 숫자 따위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을뿐더러 남과 끝없이 비교하는 우울함을 만들게 된다.
그것이 찌질하더라고, 때론 완벽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완벽한 척” “행복한 척” “괜찮은 척”
척척척 하지 않은 세상에 살 수 있다.
별점이 음식의 맛을 보장할 수 없고, 비싼 옷으로는 자신감을 살 수는 없다.
나이가 그 사람의 인격을 대신 할 수 없고, 연봉이 그 사람의 노력을 평가할 수 없다.
나를 마주하는 것 그것만이 숫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로 살아남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