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와 벌 x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 조가람
가난과 빈곤에 얽혀살던 이들은, 어쩌면 자신들도 이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시작해, 범죄라는 행복의 정당화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책 <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 속에서 주인공 조지나는 제대로 된 집이 아닌, 자동차에서 먹고 살아가며 맥도날드 화장실에서 씻는 생활을 반복한다. 이에, 조지나는 주인에게 사랑을 듬뿍 받는 개를 훔쳐서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마치, 놀부가 까치의 다리를 부러트리고 다시 치료해주어 금은보화가 담긴 박씨를 기다리는 것 마냥, 그들은 이젠 더이상 똥차가 아닌 진짜 집에 살기위해 이 방법 밖에 없다는 이유로 범죄라는 광범위하고도 수준이다른 분야에 발을 내딛게 된다. 조지나는 윌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이내 윌리를 내버려두고 삐걱거리는 베란다 계단을 밟고서 내려온다. 조지나는 “ 난 아무소리도 못들었어 ” 라며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 난 나쁜 사람이 아니야. 이건 멋진 계획이야. 결국은 모두 다 행복해질거야 ” 라며 그렇게 믿고 싶다는 자신의 믿음을 범죄에 적용하며 자신의 행복과 죄의 무게를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 죄와 벌 > 속 라스콜리니코프도 마찬가지이다. 라스콜리니코프 학문에 열정은 충분했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며 대학도 장기결석하고 어머니의 연금을 쪽쪽 빼내어 사는 형편없는 구렁덩이에 빠지게 되자, 라스콜리니코프는 가족들의 희망과 신뢰에 응할 수 있도록 ‘ 한시라도 빨리 무슨 일이든 저질러야 해 ’ 라며 조지나처럼 범죄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고 빠져들게 된다. 이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의 인생은 개미의 삶보다도 가치 없다고 판단하며, 시들시들한 노파는 결국 죽게 될것이기에 노파를 죽이는 일은 죄를 면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위험한 착각에 빠져들고 만다.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를 죽였지만, 행복따위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밝고 서 있는 돌처럼 혼이 없어보이게 느끼며, 적어도 지금 그에게는 동네 전체가 죽음의 세계와 마찬가지라는 절망을 맛보게 된다.
이 둘의 동기는 모두 똑같다. 가난과 빈곤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가족들에게 행복과 신뢰를 응하기 위해서, 제대로 된 집에서 살기 위해서 그들은 하면 안되는 짓을 해가며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노파의 삶따위는 부지런한 개미의 삶에도 비교가 안되니, 내가 노파를 죽여도 벌을 피할 수 있겠지? 라는 극단적이고 위험하며, 그들이 범죄로 부터 빠져나갈 통로 마저 사라지게 하는 이 착각으로 우리는 현재, 이 사회에서 자신들이 처해진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범죄를 동원한다.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벌부를 판매했다. 자신의 죄와 벌을 지워준다는 이 거짓으로 가득찬 책을 통해 기금을 마련하려고 한 레오 10세를 막기 위해, 독일의 루터. 스위스의 칼뱅이 그 앞을 막게 된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과 칼뱅의 예정설, 경제적 이유 추구의 정당화를 통해 면벌부의 판매를 간신히 막아낸 그들처럼 우리는 아무리 돈에 눈이 멀더라도, 우리는 범죄라는 울타리 속으로 스스로 갇혀서는 안되며 범죄를 행하는 이들 앞을 막고 그들에게 벌을 내릴 줄 아는 현명한 판단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 결국엔 모두가 행복해질거야. 죽여도 상관없지 않을까? ” 라는 착각으로 자신들에게 합리화를 시도했지만 그들에게 찾아오지 않을 줄 말 알았던 죄책감은 다시금 그들에게 찾아와 가슴 아주 깊은 곳, 그들이 꽁꽁 감싸둔 양심과 이성에 큰 칼집을 내어버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벌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둘을 평생 괴롭히게 만들 외로움이라는 벌은 그들이 눈을 감고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계속 괴롭힐 것이다. 마음에 짐이 되고 그 짐이 악하다 라는 이름의 금은보화가 될때까지. 썩어가는 보물 상자 속 보물은 보잘 것 없는 소망의 원천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