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잡 문제>
류호림
-자유의 나무토막-
이슬람하면 바로 떠오르는 ‘히잡’, 한 이슬람 국가의 한 여자는 히잡을 착용하지 않아 ‘도덕’경찰들에게 이슬람 규율을 깨뜨렸다는 이유로 잡혀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히잡은 왜 있는 것인가? 히잡의 유래는 성범죄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뀔수록 히잡은 여성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철창으로 바뀌게 되었다.
히잡은 여성의 자유를 침해한다. 왜 자유를 침해할까?, 옷차림 조차도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선택권을 사회에서 보장해주지 않는 걸까?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는 것은 남성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오직 남성의 성욕 절제를 위해 여성의 자유를 억압한다, 이는 완전한 남녀 차별 문제인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본성인 성욕, 이를 억압하는 것은 사회의 올바른 모습이고, 욕망하는 자를 위해 욕망하도록 만드는 자를 규제하는 것은 알맞은 것일까? 이슬람교의 여성들이 오래전 히잡을 금지했을 때 히잡을 입고 거리에 나가 시위하였고, 지금은 히잡을 입고 싶지 않아 시위했던 이유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이 바랬던 건 히잡을 입고 안 입고가 아니라, 히잡을 입을지 안 입을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가진 히잡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서도 이상적인 모습의 외모를 하고 있지 않으면 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반드시 존재한다. 특히 대한민국의 히잡은 ‘주류와 비주류’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장애인이 있는데, 서울의 강서구에서 장애인 특수 학교 설립에 대해 주민 토론회가 있었다. 장애인의 부모들은 학교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며 그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었지만 사람들의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어쩌라고”,“쇼 하네”,“그럼 너희 집 앞에 기피시설 지어봐”. 심지어 그 날 올라온 뉴스 기사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모자이크 처리 되었지만 장애인 부모들의 얼굴은 훤히 내보내는 등 언론조차 ‘일반’사람들의 편이었다.
장애인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의 또래 집단에서도 비주류를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는 쉽게 느낄 수 있다. 모두 비슷한 옷과 비슷한 머리 스타일, 비슷한 화장법, 사교적인 성격.. 이 조건에 충족하지 못하면 ‘찐따’로 취급받고 또래 집단이라는 집단에서 소외 받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주류, 비주류라는 히잡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교육에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목표를 위해 달려간다. 중 고등학교 내신을 잘 따고,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 우리나라에서 고졸이라 하면 무식하고 질이 안 좋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크다. 유독 다른 나라보다 대학에 엄청나게 집착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발표나 토론 등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교육보다는, 암기와 주입을 목적으로 하는 전형적인 동양식 교육을 한다. 그렇다 보니 나의 의견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짓이라고 인식하게 되고, 남들 사이에서 튀는 것이 쪽팔리게 느껴지는 현상을 초래하면서 남들과 ‘다른’ 비주류들을 ‘틀리다고’ 인식하며 우리 사회에 히잡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서열은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우리만의 기준을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양하기에, 그 기준 속에 완전히 적합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그 기준에 완전히 벗어나는 인간도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서열은 가르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결국 그 방법을 수정한다고 해서 서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새로운 히잡은 또다시 탄생할 것이다.
또한 히잡은 단순히 문화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는 수단이다. 즉 인간은 어디까지나 신분상승이라는 단어를 열망하지만 평등이라는 단어는 내가 차별을 받고 있을 때만 떠올린다. 인간에게 있어서 상황에 따라 신분, 즉 서열이 주는 쾌락과 차별은 너무나도 극단적이고 자극적이기에, 인간에게 서열과 평등이 없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무 토막을 계속해서 절반씩 토막내면 그 나무 토막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 나무 토막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듯이, 우리도 서열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구는 완전히 없앨 수 없지만, 계속해서 이러한 불평등과 자유 억압의 문제를 제기한다면 이 나무 토막의 크기는 점점 작아져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더욱 소중해지는 발전된 사회의 모습을 갖춰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