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히잡 문제>
정서윤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들이 인간 구성원의 기본적 조건에서 베제되는 장면을 보면서 정작 선을 강조하는 인간의 모습은 어디갔는지 생각해보았다. 우리의 스승이라 칭송받는 맹자, 공자, 이황같은 사람들은 각자만의 사상을 믿고 살아왔지만, 그중 하나에는 "자비인도"라는 사자성어를 하나의 결론으로 단정짓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느끼는 인간의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립은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가? "선용되고 있는가, 악용되고 있는가?"
히잡이라는 단어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지문의 말에 금시초문인 듯 확인하고 또 확인해보았다. 예전에 이미 사라진 듯한 그 히잡이라는 존재는 아직까지 어릴 때 배웠던 도덕시간의 잔상처럼 남아있었다. 여기서 지금도 배우고 있는 "명예살인"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키거나 더럽힌 행위로 명예롭게 살해당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사건 때문에 한 여자가 산채로 어머니에게 불태워졌다는 영상을 보고 히잡 사건들의 뒷배경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라는 것을 일부 짐작해보았다. 그들은, 특수부대경찰이라 불리는 그들은 히잡을 느슨하게 쓴 여성을 죽이고, 폭행하는 나라의 강제성을 상징한다. 그들에게 명예살인이란 우리나라에게선 이해될 수 없었던 태도였고, 우리는 그들을 향해 자연스럽게 야유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자문화 중심주의적 태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애초에 잘못된 행동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들의 규제 방식과 법, 예를 들어 머리카락 한 올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그들의 신체 부위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중요한 증거들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견적인 사상은 문화에 대한 잘못된 인지와 부조리를, 여성에 대한 부당성을 보여준다. 예전부터 여성들은 이러한 역사의 팽배성에 자주 엮여있었고, 이러한 잔인한 사건들을 겪으며 입막음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10만명의 여성들이 시위를 하며 "여성, 자유, 법"에 대한 키워드를 외치는 장면이 마치 소년이 온다의 민주화 대항 시위를 연상케 하는 듯 하였다. 10만명의 눈동자는 그곳에서 빛났을 것이고, 팔다리는 필사적으로 그들의 몸짓을 막는 옷주름의 저항에 굴하지 않고 신속하게 흔들렸을 것이며, 다리는 법에서의 규제를 신경쓰지 않고 누구보다 자유롭게 움직였을 것이다. 마치, 그날의 그때처럼, 그날의 기억들처럼.
세상을 상징하는 법은 우리가 중요케 여기는 규제가 되기도 하고, 우리가 우리의 혼령을 자연스럽게 비판하는 명분을 만드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10만명의 시위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과 결과를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엄마가 나에게 보여주는 인스타에서는 성인 회사 대표님 뻘의 아저씨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외국 팝송을 부르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정말 신기하였고, 이것이 초월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댓글을 보니 "인지부조화를 가장 잘 실천한 아저씨같다"라는 내용의 댓글이 있었다. 히잡도 그렇다. 남성들의 유혹적인 시선과 그들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규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세상에 펼쳐진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로테에게 격정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로테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히잡을 둘러싸고, 온 몸을 다 가리는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법을 이행하지 않을 시, 명예롭게 폭행을 당해 죽더라도 그들은 벙어리처럼 아무말 할 수 없는 신세일 것이다. 그들에겐 "저럴 짓을 했으니까"라는 인지부조화적 사상이 뼈까지 새겨져 있을 테니까.
여성들은 시위를 벌이고, 히잡 금지에 대한 법에 반대하고, 히잡 의무화라는 법에도 반대하였다. 새로운 시대를 써내려 간 하나의 아름다운 날갯짓이였지만, 히잡은 "남과 나와의 다름"을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히잡적 사상"을 가지고 살아간다. 남자들이 군대를 가야하는 시절이 오면, 여성들은 '난 군대 안가니까 다행이다'라는 사상을 가지게 되고, 여성들이 생리라는 고통에 잔인한 비명을 내지르며 아파하는 것을 보며 '난 여자로 안 태어나기를 잘했다'라는 사상을 가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우리가 사회에서 정해진 법을 근거로 성적으로, 개인적으로도 우리의 결속성을 분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유를 찾고 싶어서, 모두가 결속성을 가지고 차별 없이 살아가는 뻔한 하나의 구절을 토해내기 위해 10만명의 눈동자와, 팔 다리와 열정을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히잡은 우리가 날갯짓을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모두를 규제함과 동시에, 모두를 해제시킨다는 양질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살이찌고, 내성적인 사람들도 그렇다. 그들은 사회에서 베제되고, "자비인도"라는 사상에 걸맞지 않는 사회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이 나서서, 어쩌면 용기를 내었기에 친구들과 친해지고 말을 잘 할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나에게 말을 걸기만을 기다려주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행동이고, 살을 빼려다가 계속 상처를 받고 좌절하게 되는 행동도 어리석듯이, 그저 자신의 행동을 매력으로 순화시키고 대항할 수 있는 용기가 그들에게는 있었기에,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인 본능, "야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는 히잡을 양질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물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한다.
우리의 사회와 나의 도덕시간은 문화 상대주의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진정하게 선두적으로 추진해야 할 행동은 "하나의 날갯짓"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눈이 내리는 곳에 인위적으로 태양을 비춘다는 용기를 내어 그 빙하에 가두어져있는 바이러스의 표본이 퍼졌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우리의 물부족 문제가 해결되고 나라가 조금 더 풍요로워진다면 그것은 인간의 생존과 자유로운 물의 사용에 연관지어 "좋은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히잡을 벗어던지는 것은 하나의 국가 규제 파괴의 시초점이 될 수 있지만, 여성들의 자유와 빛나는 눈동자에 대한 청산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비록 이것이 사회의 질서를 일부 파괴할 수 있는 "쿠데타"라는 안좋은 말로 악화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모두의 자유와 편견, 지금도 히잡으로 인한 명예살인이라는 어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당신의 사상에 실금을 내줄 하나의 "날갯짓"이라고 순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