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티 Nov 12. 2024

패배자의 자리

박재영



나를 과대포장할 생각은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얼굴도 못생겼고 그렇다고 해서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나를 포장할 말주변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 중심이 되고 약간 ‘잘나가는’ 아이들 무리에 끼려면 절대 불가능한 스펙이다. 말주변으로 상대방을 웃기고 무리의 분위기를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근육질의 몸으로 남에게 위압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각같은 얼굴로 다니는 곳마다 시선을 부여잡는다고 말하면 그건 정말 누군가에게 맞아 죽어도 될만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도 아예 친구가 없이 지낸다고 하면 또 그건 아닌 것 같다. 솔직히 운이 매우 좋았다. 몇 가지 결정 그리고 새로운 도전 덕분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지역으로 이사와서 처음 가보는 중학교에, 소외되지 않은 것은 매우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행운을 만든 것은 내 말주변도 내 외모도 아닌 바로 ‘축구’, 즉 스포츠였다. 스포츠는 사람을 다르게 만든다. 온순했던 사람을 사자로 만들고 난폭하던 사람이 그라운드 위의 신사로 변하기도 한다. 내가 다른 스포츠를 많이 즐기진 않지만 축구만은 정말 많이 한다. 축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을 친구로 만들어주고 친구를 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스포츠의 힘 아닐까.


운동장을 달린다. 비록 체육관이 신설되면서 운동장의 크기는 실제 경기장의 절반인 50m 로 줄어들어, 체력적 부담은 적지만 20m 수준이었던 초등학교 운동장에 비하면 두 배 이상 커 예전에 가끔 뛰던 경기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축구에 어울리지 않는 나이키 에어조던 같은 신발을 신고 모래바닥을 뛰며 발의 코로 볼을 차던 시절은 그다지 볼을 잘 차지도 못했고 나가봤자 예능을 찍고 클리어링을 못해 자책골을 넣으며 욕을 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무언가 달라진 것 같다. 잔뜩 가오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14세의 나이에 겉멋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다르다. 오늘 나는 우리 반의 주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뛰었다. 그저 초록색 색지에 ‘captin’ 이라고 영어로 적은 띠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내 팔에 있을 때와 없을 때는 매우 달랐다. 수비가담 시 거친 백태클이나 성질을 못죽이고 나오는 관중석 슈팅 같은 것도 조금 억제하는 것이 그 완장의 역할이었으며, 골키퍼에게 거친 몸싸움 겸 압박을 거는 것도 조금 줄게 되었고 발목에 힘 역시 더욱 들어갔다. 예전보다 시야는 더더욱 상대 수비와 내 발 끝에 집중되었고 골대의 은색 크로스바의 쇠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단순히 동네 축구가지고 뭘 이렇게 하냐, 라고 하면 딱히 할말은 없겠지만, 공과 디딤발, 그리고 발등으로 전해져오는 약간의 통증과 날아가는 볼을 보며 느끼는 쾌감, 그런 것들이 내가 스포츠를 지속하게 해주고, 소외되는 것을 막았으며, 모르는 사람을 친구로 만들고 또 친구도 적으로 만들 수 있는 스포츠의 힘이었다.


이처럼 스포츠라는 것은 단순히 학교 점심시간에 하는 축구, 라는 타이틀을 넘어서 사람을 끈끈하게 결속시켜주는 결속력을 다질 수 있고, 내가 주장으로써 퇴장당할 만한 행동을 최대한 자제한 것처럼 사람의 인격적인 결함을 개선시켜주거나 조직 내에 단합력을 다질 수 있다는 교육적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서양권 문화에서는 이러한 스포츠의 교육적 특성을 매우 중요시 여겨 교육에도 스포츠가 매우 많이 반영되곤 한다. 특히 스페인, 프랑스, 영국, 독일과 같은 유럽권 국가들에서 이러한 교육이 잘 조성되어 있다. 우리가 축구 국가대표 하면 생각하는 선수가, 영국하면 포든과 한국의 자랑 손흥민 선수와 ‘손케듀오’로 유명한 해리 케인, 그리고 매과이어와 같은 선수를 생각하고 독일하면 마누엘 노이어,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와 같은 선수를 바로 떠올릴 수 있으며다. 스페인으로 하면 호날두와 같이 여러번의 챔스 우승을 하고 벤제마와도 여러번의 챔스를 경험한 백전노장 베테랑, 다니 카르바할과 올해 발롱도르 수상자 로드리, 그리고 유벤투스에서 뛰었던 모라타 같은 선수들을 축구를 모른다고 해도 바로 알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수 있는 슈퍼 스타 킬리안 음바페와 아틀레티코로 돌아간 그리즈만, 전갈킥의 지루 등 유명한 선수들이 많이 있다. 조금 예전으로 가보면 잉글랜드에는 마이클 오언, 웨인 루니, 그리고 2014년 빌드업 진행 중 넘어지는 실수를 해 국내 팬들에게 크게 유명해진 선수, 스티븐 제라드가 있었고 프랑스에는 마에스트로 지단, 루이 사하, 아스날의 키플레이어 비에이라 같은 선수들이 있었다. 독일에는 수문장 올리버칸과 선수로서는 누구보다 훌륭했던 클린스만, 마테우스 같은 선수가 있었고 스페인에는 세 얼간이들 중 두명의 얼간이 이니에서타와 사비가 있었고 바르샤를 책임지던 부스케츠 역시 그곳에 있었다. 조금 선수들에 대한 설명이 길어지긴 했지만, 유럽에서 스포츠에 관한 교육은 매우 심도 깊게 진행되고 있고 이러한 스포츠 교육은 재능을 가진 인재들을 키워내는데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러한 유럽권의 스포츠에 대한 조기 교육 및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비중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 <해리 포터>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 <해리 포터>에는 퀴디치라는 가상의 스포츠가 존재하는데 이 퀴디치는 해리 포터 안에서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처음 해리가 학교에 와서 단순히 부모의 뒷배경으로 이름을 알리는 것이 아닌 용감한 비행 및 플레이로 이름을 알리고 말포이가 속해있는 기숙사와의 경쟁을 통한 해리의 성장에도 퀴디치는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준다. 나는 어쩌면 퀴디치라는 스포츠가 없었으면 해리가 말포이와 경쟁을 하는 방식도 달라졌을 것이며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하는 계기 역시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리가 스포츠를 하면서 겪은 일은, 내가 주장완장을 차고 성격을 통제하며 퇴장을 자제해, 더 이상 거친 파울 없는 축구를 할 수 있고 나의 틀어진 인격적 결함을 고치는데도 그 완장은 큰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해리 안에 있던 개인적인 사심이나 욕망과 같은 감정들을 주장과 그리핀도르의 유망주라는 무게감으로 억제할 수 있는 건강한 억제제가 되어주었으며 이는 말포이와 대립할 때 주변 학생들이 끝까지 해리를 지지하게 해주는 통솔력, 리더십을 키우는데도 큰 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스포츠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다. 잘하지 못하면 방출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구단 ‘레알마드리드 CF’이다. 레알마드리드 CF는 ‘갈락티코’ 라는 정책을 추진하며 유럽을 넘어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구단으로 이적시켜 챔스, 리그, 모든 대회를 우승할 준비를 하는 세계 최강의 팀을 구축하는 정책을 페레즈 회장의 지도 아래 계속해서 추진시키고 있다. 이러한 갈락티코로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수 많은 축구선수들을 만날 수 있었다. 최근 선수들로는 실력만은 미워 할 수 없는 비니시우스, 그래도 분명 부활할 수 있는 음바페, 잘생긴 미남 미드필더 벨링엄 등이 있으며 몇 년전에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벤제마, 베일, 지금도 현역인 모드리치와 얼마전 마지막 강의를 우승으로 장식한 교수님 토니 크로스가 있다. 또 더 옛날로 가보자면 이제는 아이콘이 되어버린 카카와 호나우두 등이 있었고 이들이 떠난 과도기에 라모스와 페페라는 철벽들이 들어온다. 이처럼 언제나 최강이었던 레알마드리드는 챔스를 무려 15번이나 우승했고, 그 결과 현재 유럽 최강의 팀으로 거듭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의 길은 매우 잔혹했다. 페레즈 회장은 갈락티코 멤버들이 아무리 좋은 기량이라도 30대를 넘기면 재계약 대신 주급을 삭감하고 단기 계약을 맺었고, 호날두와 라모스 같은 선수들이 헌신에 대한 대우에 불만을 가지고 팀을 이탈했다. 그러나 라모스는 팀을 떠나자 장기부상, 호날두는 그래도 Greatest of all time,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인 만큼 유벤투스로 가서 폼이 많이 죽지는 않았으나 레알 시절 폼이 나오지 않고 세리에에서도 호날두가 했다기엔 다소 실망스러운 골이 나오는 등, 냉혹한 계약은 결과적으로 구단에 큰 이익을 가져왔다. 어쩌면 유럽의 아이들은 이를 통해 패배자의 자리, 실패자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배우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이러한 스포츠에 대한 교육 대신, 줄세우기 방법과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막말은 한번만 해보자면, 유럽에서는 패배자의 자리는 없고 실패자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갈락티코와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스포츠를 통해 교육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줄세우기로 실패자를 위한 자리는 없다는 것을 교육하는 것 같다. 물론 두 방법 모두 실패자의 자리는 없고 오직 세상은 강자만을 우대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려주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줄세우기 교육방법보다는, 갈락티코를 통해서 실패자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해리포터> 속 해리포터는 리더십과 통찰력을 퀴디치라는 스포츠를 통해 배웠다. 아동 교육을 전공한 작가가 과연 허구의 내용을 책 속에 적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분명 허구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축구하는 것을 매우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Next 카르바할, 모드리치, 크로스가 될 아이들은 정해져 있고 나머지 아이들은 그저 더보기리그 선수, 아니 일반인이 될 운명이고 그들은 학업을 선택해 사회에 필요한 인재로 거듭나면 된다. 아이들은 상처받지 않는다. 그저 길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길을 걷고 그들과는 좋은 친구로 지낼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유럽에서 흰색 체육복을 입고 잔디에서 뒹굴며 노는 것과 다르게 대한민국에서 14세란 나이는 교복을 입고 움직이기도 불편한 쓰리피스 동복 풀세트를 하루 종일 입어야 한다. 패배자의 방법을 우리는 이렇게 쓰리피스 동복을 입히고 자리에 앉힌 후 시험을 쳐서 결정짓고 저 자식만 누르면 내가 패배자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한다. 하지만, 유럽은 다르다. 갈락티코가 될 아이들에게는 갈락티코의 길을 이른 조기교육과 스포츠로 제공해주고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 될 아이들은 같이 축구를 즐기다가도 자연스레 지쳐서 교실로 들어오고, 그런 아이들에게 교사들은 수업을 진행한다. 길을 따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대한민국에는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 밖에 믿을 선수가 없지만 유럽에서는 해리 케인과 사비, 부스케츠, 크로스, 노이어가 탄생할 수 있었던 원인이며, 현재도 유럽 교육이 동양 교육보다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패배자들에게 자리는 없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방법이, 줄세우기가 좋은 것일까? 아니면 그들에게 자연스레 현실을 알려주는 것이 좋은 것일까? 정확한 답은 없겠지만, 천재들을 추려내기에는 자연스레 이탈자들과 갈락티코가 될 이들을 판별하는 것이 현명하다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낙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