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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Nov 16. 2024

독백

정서윤




공기의 미세한 흐름을 맡으며 아침을 시작하다보면, 다시 엇갈린 수많은 선들을 풀어야만 한다는 죄악의 의무감에 시달리는 날들이 대부분이다. 가족이란 것은 처음부터 다른 색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결합되어 하나의 상속을 담당할 사람이 태어난다는 세상의 부패한 주장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사실상 가족의 존재를 별로 믿고 싶지 않았다고, 이러한 연대의 핏줄이 어쩌면 자랑스럽기도, 어떨 때는 부끄럽기도 한 순간이 찾아오면 난 항상 해리포터의 말포이처럼 순수혈통의 무언가를 찾으려 노력했다. 수없이 반복된 만남과 헤어짐이 익숙해질때 모두는 이러한 관계에 지침을 느낀다. 나는 뭔가 이러한 관계에서 지침을 느낀 적이 적지 않았으며, 이것은 단순한 환경적인 영향이 아니라 이러한 과거의 영향에서 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보았다.


오늘도 우리 집 파란 바다에 아직 뜨지 않은 햇살에게 입꼬리를 올려 인사해본다. 고지대라 그런지 추운 나에게 짜증이 밀려들어오지만, 이 정도는 기본이며, 알람시계에도 최대한 조용하게 행동할 수 있는 기술까지 획득했던 지라 모두에게 거슬릴 만한 요소는 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곤 한다. 사람들에게는 나의 좋은 모습과 설레어지는 모습만 보여야 하니까. 이러한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단순한 찡그림 없이도 이러한 것들을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간지러운 말투를 내뱉어본지가 오래인지라, 모두의 행동들이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 다반수였다. 친구들의 유분수 없는 행동들이 어쩌면 마음에 안 들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일방적으로 참았다. 까이고 까여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말만을 내뱉으며 이러한 세상에 적응하는 행동밖에는 하지 못했으니까. 가족에게 애써 친근하게 굴어도, 마냥 행복한 순간, 혼자 공상하는 순간에 만든 지우개똥이 더욱 귀여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하늘에 매료되어 꿈을 거듭하는 것은 과연 죄악일까.


세상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은 생각보다 어릴 적 부터였다. 태양에 사각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던 나에게 스쳐진 볕뉘는 새학기의 나를 누구보다 찬란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세상은 달랐다. 사람들의 성화는 나날이 계속되고, 머리를 복복 쓰다듬어주기보다는 가장 행복한 오후에 비구름을 내리는 폭풍우같은 목소리가 하루종일 어린 나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거친 목소리와 내려지는 벌들로 마음은 점점 까내려져 가고, 상처와 피에 물들어 하루도 성할 날이 없는 내 다리처럼 좋지 않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럴 때 같이 있어준 것이 할머니였다. 엄마 아빠와 싸울 때도 무조건 나의 편인 할머니는 서럽게 우는 나의 눈물을 휴지로 닦아줄 정도의 다정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언제나 내가 그녀의 품에 뛰어들때마다 토닥이는 손길과 냄새는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네가 울면 할머니도 마음이 아파"라는 말에 더 서럽게 울게 된 난 사랑과 돈, 명예 등은 죽음의 바다에 떠내려가지만, 이러한 가족만은 언제나 나에게 남아있을 수 있다는 가치관을 확립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잔인한 역사를 보자면, 모두 가족을 잘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가정폭행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온갖 불쌍한 상황들은 전부 다 겪고 강인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유형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요즘도 가족이라는 따가운 햇볓 밑에서 들들 볶이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는지라, 나는 되게 좋은 부모님을 만났다고 생각하였고, 절규에 가까운 다른 사람의폭력에서의 구원과 도움의 외침을 화장실에서 들으며 그들의 부모는 얼마나 심각하길래 저렇게 편협된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나는 이러한 부모 없이 잘 살 수 없는 부모 의존증인데, 같은 배부른 소리를 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이 같은 경우에는 심사임당이라는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를 가질 수 있어 성장하게 되었다면, 반면에 특히 심한 가정 갈등을 갖고 태어나 강인한 진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들과 똑같이 취급되곤 하였다. 영화에서 조커는 사람들을 겁 주기 위해서 화장을 하는 것이라는 일련의 컨셉을 잡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들키지 않게 가면을 썼다. 영화 가타카에서처럼 우리는 모두의 우상이 되기를 원하는 존재일 뿐이었고, 싯다르타처럼 깨달음을 찾으려 나아가는 것 같다가도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벤란트처럼 강물에 어루만져져 떠내려가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는 특성들이 공존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범람체에 가까운 존재였다.


히틀러의 강제 수용 정책, "나치"를 기억하는 분들은 많을 것이다. 모두의 이면이 존재할 정도로 이것은 우리 가족의 모든 것들을 표현할 만한 역할에 적절하였기에 가져와보았다. 워낙 잔인하고 인재를 죽인 안타까운 사건으로 추앙되기에, 나도 예전에 책에서 보았던 기억을 끄집어내어 본다. 아우슈비츠 교도소에서 유대인들은 자신이 유대 종족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신념의 불꽃을 강제적으로 끌 수 밖에 없었고, 별 모양의 뱃지를 달고 있어야 했으며, 줄무늬의 옷을 입어야 했던 미개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모든 것들을 동원해야 했으므로 피붙이를 만들 여력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저 쉬쉬하며 살았을 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의 본분을 다 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교차된 욕망 속에서 살아가며, 수없는 부딫힘을 겪으며 자신의 삶을 찾는다. 보아라, 인간은 자신의 의식의 절벽 끝에 달린 스파이디 키링처럼 대롱대롱 달려 있을때, 혈통과 가족을 모두 무시하고 그저 자신만이 어서 살아남기를 기도할 뿐이다. 나는 지금도 그 욕망이 나의, 우리 모두의 피에 흐르고 있다는 것에 경멸하며, "배타적 성격"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혐오감이 드는 성질이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모두 가지고 있는 꼬리표이니라.


신은 잔인하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한 것을 뻔히 알면서 불을 준 그를 벌하고, 인간에게 추위와 고통을 주었으며, 가끔은 탐욕을 가진 인간들과 죄 없는 인간들까지도 자신의 안일한 행동으로 종결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렇게 풍자적인 신이더라도 우리에게 "가족"이라는 기댈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준 것이 최고의 행동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존재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이 되어야지 가족을 만들 수 있다는 불행한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그저 만들어진 인간에게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그들의 질투심이 지금의 가족관계에 파멸을 일으킨 것이고, 내 주변에 가족관계를 잘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 한 것은 아닐까. 흔히 비롯된 "흙수저"나 "금수저"라는 키워드로 우리는 가족관계를 나누기도 하며, 유행하는 가치관에 획일화된 사람들의 생각으로 뉴 미디어의 심각성이 도래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사춘기에 빠진 학생들이 이러한 매체들에 중독이 되면서 가족과의 소통은 감소하고, 말도 못 나누고 생을 끝내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마르지 않는 물의 원천이 바로 비와 날씨이듯, 우리도 운명적인 유전자의 확률적인 변수로 만나 서로를 의존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요즘은 가족으로 살고 있어도 가족으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들이 많다. 난 이러한 세부적인 갈등을 찾는 인간의 의미없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은 가족과 "비즈니스 관계"만을 맺고 있다는 것이 현실 아닐까. 정확히 개인적인 것들만 이야기하고, 모든 비밀들은 그저 마음속에만 담아두는 우리의 행동들이 가족들로부터 모든 걸 바라는 마음과 충돌되어 조각의 파편으로 분해되듯 찢긴다.  "목숨을 연명하며 완전한 소통 방식의 이상적 형태를 꿈꾸는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그릇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그릇되지 않은 진심들이 우릴 더욱 고립시키게 된다는 걸 알까."


우린 독백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자신의 페이지를 써 내려가는 중인 사람들도 많을 것이며, 이미 전성기를 맞이한 사람도 많을 테지만, 난 아직 이러한 것들을 모두 실천해보지 못한 그저 가족이라는 존재에만 정신팔려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모두의 성화에 내가 그렇게 상처를 입고서 내가 그렇게 상처를 잘 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늘 가정 시간에서 배운 "모방소비"라는 단어처럼 이렇게 모두를 지켜줄 수 없다는 진실을 잘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가족이라는 존재를 상처를 해결할 때 쓰는 방패로도, 외로울 때 옆에 있게 하는 존재로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고 사람들과 행복한 소통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도 모두 쓰고 싶지 않다. 가족은 우리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사람일 뿐, 모두에게 버림이라는 요소를 주고 마치 기분 좋을 때만 행복하게 대했다가 화가 나면 나의 모든 것을 뺏어가는 우리 엄마처럼 그저 대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것이 배부른 소리라며, 좋은 부모님을 가지는데 이것이 왜 부족하냐면서 문제제기를 할 수 있으나, 미안하지만 세상은 혼자이다. 우리 모두 혼자 독백을 써 내려가는 것이며, 지금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가족으로써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을 때의 세상의 잔인한 비판이 무섭고 소름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족은 존재하지만, 난 그것을 제발이지 내가 동경했었던 추억의 모습으로 남겨두고 싶다. 모두가 눈물로 차있는 세상이 어쩌면 두렵고 무서울 수 있겠지만, 나 자신은 내가 가장 잘 믿을 수 있다는 가치관을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되새기며 일어날 수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한 안개의 흐림을 걷어내고 나에게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게 되는, 나만의 성질이 담긴 독백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족을 하나의 아름다운 동경과 희망의 요소로 남긴다면 좋겠다. 요즘은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 없이 혼자 세면대를 틀고 울면서 나만의 빛에만 기댈 수 있다는 잔인한 현실이 조금 더 나를 엉키게 만든다는 건, 누구나 알면서도 조용히 행동하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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