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호림
사람들은 자신만의 바다를 꿈꾸며 살아간다. 다만 누군가에겐 그 바다가 파란 빛이며, 다른 누군가에게 그 바다는 초록 빛이다. 서로의 목표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내가 나라는 운명은 바꿀 수 없기에 점점 다양해지는 길의 갈래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하고, 점점 곁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찾아가며 나는 혼자가 된다. 따라서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롭고 어렵고 쓸쓸하다. 하지만 헤어짐이 두렵다고 해서 남의 인생을 따라갈 순 없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에 나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나만의 바다를 찾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바다를 찾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도대체 나의 바다가 뭘까? 나는 누구지? 나에게 나는 누군지를 묻는다면 그저 엄마의 딸, 아빠의 딸, 동생의 언니 정도로만 답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가 아니라 상대방의 누구로만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더더욱 나에게 이 책이 주는 울림이 컸던 것 같다.
“저기 지평선이 보여? 초록색으로 일렁이는 여기가 내 바다야.”
“나도 여기가 좋아요. 여기에 있을래요.”
“너는 펭귄이잖아. 넌 네 바다를 찾아가야지.”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될 일만 남았네.
이리와, 안아줄게. 오늘 밤은 길거든”
솔직히 14년을 거쳐온 나의 인생에서도 나의 바다가 어떤 모습일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 혼란스러움을 외면하고만 싶어서 남에게 의지했다. 작고 사소한 아이스크림 하나를 고를 때도 꼭 친구들이나 부모님께 선택을 맡겼다. 단순하게 남들 다 있는 결정장애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내가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언젠간 누군가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팠고, 나를 찾을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두려움의 눈을 애써 피했다. 하지만 계절은 계속 변해가고, 그 계절을 막을 수는 없기에 변해가는 계절 속에서 혼자 적응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해왔다. 점점 다양해지는 길 속에서 많은 헤어짐을 마주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에게 헤어짐이란 전혀 익숙하지 않다. 헤어짐이라 하면 초등학교 때 친할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한 경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군가가 헤어짐에 익숙할까, 나 뿐만 아니라 아무도 헤어짐에 익숙하지 않다. <긴긴밤>을 읽으면서, 헤어짐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
나의 삶을 찾는 과정에서의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떨쳐내기 위해, 나는 헤어짐을 서로를 위해 서로를 놓아주는 과정으로 정의하기로 했다. 우리가 향해 달려가는 바다의 색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찾아 모험을 떠나야 한다. 펭귄과 흰바위코뿔소가 계속 걸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 끝을 모르고 따라서 더욱더 그 끝이 막막해보일지 몰라도 외딴 곳에서 모험하는 과정은 곧 나의 자아의 성장이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걸어나가야 한다. 하지만 언젠간 갈라질 갈림길의 모퉁이에서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놓아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DNA와 다른 속도의 혈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인격체인 이상 영원히 함께할 수 없기에, 하지만 그 영원을 믿어보며 언젠가 교점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기약하고 등을 돌린다. 그 과정은 아플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픔은 함께 붙어 있는다 하더라도 서로의 길을 찾지 못하고 헤메는 고통보다는 덜할 듯하다. 이제는 너 뿐만 아니라 과거의 어렸던 나, 나 자신이 두려웠던 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그렇게 총 2번의 헤어짐을 맞이하며 나는 나아간다. 앞으로의 밤은 더더욱 긴긴밤이 될 것 같지만, 그 긴긴밤이 나 자신에게 질문하는, 나의 자아를 알아가며 더 믿고 더 사랑해줄 수 있는 충분한 밤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