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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개의 세계

by 제이티

유지민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온라인 이라는 가상 세계에 몸을 반 이상 잠그고 말이다. 이 별개의 세계에서 우리는 정체성과 자아를 탐구 한다. 내가 자리잡은 공간은 이 별개의 세계 인 것이다.

물리적인 세상을 나날이 잃어간다. 우리는 점점 더 화면 속 댓글들, 좋아요에 웃음을 맡기고 누군가와 소통을 한다. '보여지는 나' 가 나의 정체성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한껏 꾸미고 마스카라를 올린 나의 사진이, 인스타의 하이라이트에 들어가게 될 사진을 우리는 그렇게도 굳건히 믿는다.

현실의 나는 상처를 받기도, 외로워 하기도, 열등감에 몸부림을 치기도 하곤 한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집 문을 여는 날들도 있고 지치고 괴로워 머리를 뜯어보기도, 한숨을 푹 쉬기도 한다. 그렇나 그렇게도 불완전한 나를 SNS 라는 세계에선 뭔가 소중한 공주 마냥 받들어 주곤 한다.

그렇게 따듯했었던, 혹은 낭만 가득했던 현실의 온기가 인터넷이라는 ‘없는 공간’ 속으로 넘어 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 안착하고 의지 한다. 허나 신기술엔 언제나 따르는 커다란 단점, 문화지체 라는 문젯점이 있다. 그렇게 SNS 의 구멍들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천을 들어 올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낡아진 후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교는 이제는 ‘글로벌’ 을 대상으로 전세계 사람들의 경쟁이 되어 있다. 그저 모두가 예쁘고, 모두가 잘생기고, 모두가 좋은 학점을 받으며 모두가 매일 같이 5성급 호텔으로 여행을 다니는 것으로 느껴지기 마련인 것이다. 평균이 손을 데지 못할 만큼 올라 있는 것이다. 우리는 SNS 를 사용함으로써 불안, 아노미, 외로움 등에 잡아먹히고 만다. 점점 더 혼자 이게 되고 내가 서 있는 섬의 둘레는 점차 작아지고 또 작아져 소멸을 가르키고 있다. 이 땅에 남은 것은 우울함이 다 이게 되는 것이다. 허구와 싸운 다는 것은, 수많은 가상 자아들과 거울 속 나의 모습을 비교해 본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 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두 세계 사이의 괴리는 점점 더 깊어져만 간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쉽게 자각하지 못한다. 자존심만 끝없이 바닥을 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내 눈 앞의 물리적 세계를 만나기 전에 SNS 를 접한다. 완벽한 시뮬라르크의 세계, 혹은 영화 ‘트루먼쇼’ 와도 비슷하게도 말이다.

‘소수의 지속적인 우정’ 은 ‘다수의 단기적인 만남’ 으로 대체 되고 말았다. 익명의 사랑과 관심을 땋기 위해 사람들은 핫플레이스를 방문하며 몇시간이고 사진을 여러 각도로 찍고는 사진 밑의 맨트를 오래간 고심하고는 그제서야 개시물을 업로드 한다. 모르는 사람들이 날 알아준다는 것, 비참하고도 중독적이다. 이와 같은 종족을 우리는 ‘인플루언서’ 라고 말하여 한껏 칭송 하여 준다.


“자본주의 사회는 비주얼이다’ 라는 말이 있다. 뭐든 예쁘게, 혹은 보여지는 것에 집중을 하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적인 광고들은 우리가 매일 접하는 SNS 속에 묻어나 있다. ‘다수의 단기적인 만남’ 은 그렇게 ‘돈’ 이라는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가치 아래에서 운영되며 고작 단면적인 모습을 보고 우리는 남들을 평가를 하기를 급급하다. 내용보다는 표지의 일러스트레이션이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한 사람의 성품 이나 철학 따위의 내면 보다는 셀카에 담긴 외모가 더욱 중시 되는 시대가 되었다. 불안시대가 우리를 닥쳐왔다.


그렇게 SNS 의 구멍들이 모두 밝혀진 지금, 부모는 두가지를 두고는 딜레마를 한다. 과연 나는 아이에게 이런 해로움을 단속할 것인가, 혹은 자유를 줄 것인가를 말이다. 전자의 경우가 훤히 보기엔 당연하게도 더욱 나은 선택지 이다. 그러나 과연 현실적이지는 못한 것이다. 한번 별개의 세상을 맛 본 아이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이 새로운 자아를 맞이 했으며 이와 작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나 또한 그렇기에 말이다. 그렇게 하나의 고정된 문화가 되어버린 SNS 는 함께 하지 못할 때 소외를 낳고 반대로 함께 해야지만 소속감을 선물해 준다. 집단을 목숨만치 소중히 여기는 우리는 이런 룰을 벋어나지 못한다. 때문에 한발자국 나선 곳을 다시 뒷걸음질 친다는 것을 죽어도 실현 하지 못하는, ‘중독’ 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연스레도 이런 아이의 입장과 부모는 갈등을 겪게 된다. 이와 같은 삭막한 신경전은 21 세기의 사춘기를 정의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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