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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큼은 행복하세요

by 제이티

<올인원 글쓰기>


백지원




나도 여전히 자존감이 높지 않다. 자존감이 강해보이는 척은 잘해도, 무의식적으로 나 자신보다 남을 더 배려하게 되고, 남을 더 중요시하게 여기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에도 “이번 시험은 쉽지 않았나?” 라는 말 한마디조차 꺼내지 못한다. 장난식으로라도 이 말을 세상 밖으로 꺼내는 순간, 아이들은 매우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마치 이 세상에서는 잘난채를 하는 것이 법적으로 불법인 양 말이다. 그렇다보니 어떤 평가들에서는 늘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해서 온 몸으로 기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남들을 더 이해해주어야 하고, 남들을 더 위로해주어야 한다. 자존감은 우리가 나름 높은 위치에 있을 때 마저 조금씩 갉아먹히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아이들이 점점 잃어가는 자존감은 또 다른 종류에 속해있다. 바로 남들을 배려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내 존재를 작고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로 바라보게 만드는 자존감 하락이다. 타인을 경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무도 지켜보지 않은 내 방에서 몰래 쪽잠을 자다가도 내 스스로가 나 자신의 이 무력함을 경계하고 업신여긴다. 이는 타인을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앞서 말한 자존감의 종류와 유사하다. 하지만, 그 속에 가진 마음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들은 현재, 남들을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는 열망과 질투가 가득하다. 배려하려 하지 않고, 남을 나보다 더 우월하게 바라보기는 하나, 한치의 배려는 없다. 이 사태의 근본적인 이유는 학교 내에서, 그리고 그 외의 장소에서 늘 줄세우기와 등급 분배를 당하기 때문이다. 평가라는 것에 의해 우리들은 경계태세를 갖추게 된다. 시험기간이 되면 결국 모든 아이들은 경쟁상대가 되고, 그 탓에 수업을 들을 때마다 열심히 노트하고 있는 친구를 보며 ‘제발 잠들어라’ 라는 저주를 마음 속 깊이 품어보기도 한다. 나의 반 학생들은 거의 절반 이상이 수업시간에 잠을 자기에 굳이 잠에 빠져들라는 저주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덕에 항상 편한 마음으로 수업을 듣곤 하지만, 여전히 여러가지의 변수들을 떠올린다. 잠을 자고 있는 저 아이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게 되지는 않을지 하는 상상 말이다. 갖가지의 불안들이 아이들의 마음 속에 잠식하면서, 그로써 자존감을 잃고 열등감을 얻는다.


영화 스쿨 오브 락에서도, 아이들은 별과 까만 점으로 평가당하며 순위를 달게 된다. 그렇게 높은 점수를 받은 아이는 선생님에게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갖추는 반면, 그 외의 아이들은 매우 소심하게 자신의 의견 하나 없이 입을 꾹 다문다. 그러나 듀이는 학교 출근 첫 날부터 그 순위를 매긴 종이를 찢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공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락을 할 때의 자신감으로 평가했다. 선생님에게 반항하고, 욕하며, 순응하지 않는 태도를 배운다. 그렇게 공부만 하던 아이들은 자신들의 적성을 발견해나가면서 방음 벽을 직접 만든다던가, 의상을 직접 디자인한다던가, 아니면 혹은 교실을 자신의 감미로운 음색으로 가득 채웠다. 그들은 학교 교육 과정에는 맞지 않는 수업을 들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진정으로 필요한 수업을 들었다.

공부가 아닌 락을 할 때의 자신감으로 아이들을 평가하는 것. 물론 평가 또한 상위권과 하위권을 분명하게 나누는, 절대적인 신분제 시스템과 같은 방식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들이 진정으로 그 락에 대해 빠질 수 있도록 직접 지도하면서, 그저 조금 더 쎈 발언은 하는 아이를 조금 더 칭찬할 뿐이었다. 나는 이러한 방식이 좋았던 것 같다. 1등급, 2등급으로 나누지 않고, 별과 까만 점으로 명확한 표시를 남기지도 않고, 그저 말로 한 마디 한 마디 던지며 아이들의 열정에 조금씩 바람을 불어넣는 느낌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훌륭했던 점은, 아이들에게 직접 자신의 불만을 내뱉게 만들고, 항상 우월한 누군가를 앞에서 비난할 수 없음에 답답함을 가지던 아이들에게 발언권을 쥐어준 점이었다. 직접 말할 수 있게 하고, 직접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도왔다는 점에서 칭찬할 만한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구호 복창을 시키는 판사님도 소개해야겠네요. 무슨 군대 교관 출신 판사님이냐고요? 이분은 너무나 온화한 인상의 여성 판사님입니다. 서울가정법원에서 부장판사로 일하고 계신 분인데요, 언론 보도를 통해 이미 많이 알려진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여러 번 절도와 폭행 사건을 일으켜 소년법정에 선 열여섯 살 소녀에게 단 한 가지, 법정에서 일어나 판사의 말을 따라서 외치게 하는 처분만을 내린 분이죠. 남학생 여러 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후 자존감을 잃고 자포자기한 삶을 살고 있던 소녀에게 이분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라. 날 따라서 힘차게 외쳐라.”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다 따라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 소녀에게 다시 이분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야.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문유석- 판사유감>


이 문장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린 건지 모르겠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라는 부분에서 꽤나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어느순간부터 남들이 울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울지 못했다. 공부도 못했도 운동도 못했지만, 나보다 못하는 사람은 더 많았고, 그래서 그 눈물이 되려 기만이 될까 눈물을 삼켰다. 많은 아이들이 울고 있을 때도 나만큼은 눈물을 참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냥 내가 울기보다는 남들을 위로해주어야 한다는 게 늘 앞섰다. 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된 걸까 하고 생각해보면, 나도 누군가가 눈물 한 번 꾹 참고 나에게 위로를 건네주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나 스스로를 위로해줄 말을 따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앞의 판사와 같은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듀이와 판사님처럼, 우리들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나처럼 남들에게 눌리고, 남들을 질투하고, 남들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 그들 모두 오늘만큼은 이 글을 읽고, 아니 굳이 이 글을 읽지 않았더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항상 등급을 나눈 결과지에서 누군가의 이름들로부터 깔린 내 이름에 신경쓰지말자. 그들을 타고 올라갈 준비만 되었다면 충분하다. 그렇게 다짐했던 당신이라면 행복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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