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버튼을 누를 때, 마다

생각의 서고 52화

by 소는영




1.


아침에 눈을 뜨면, 화장실에 가기 전에, 인스타그램을 열어 어젯밤 올린 사진에 좋아요가 몇 개나 늘었을까 확인하는데 103개, 어제보다 적어서 왜지, 사진이 별로였나, 해시태그를 잘못 달았나, 아니면 업로드 시간이 좋지 않았나 고민하고, 지하철에서도, 회사 화장실에서도, 점심시간에도 확인하며 좋아요가 하나 늘 때마다 작은 쾌감을 느끼고 줄어들면 불안해하는 나.왜 이 작은 숫자에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2.


좋아요 버튼은 겉보기엔 참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장치여서 클릭 한 번으로 공감을 표현하고, 마음을 전하고, 연결되며, 강요도 없고 검열도 없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누르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자발성'은 진짜일까 의문을 품게 되는 이유는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이 현대 사회를 '디지털 파놉티콘'이라 부르기 때문인데, 파놉티콘은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으로 중앙 감시탑에서 모든 감방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시자를 볼 수 없어서 언제 감시당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죄수들은 항상 감시당한다고 가정하고 행동하며 감시자가 실제로 보고 있지 않아도 통제가 이루어지는 구조였다.



3.


미셸 푸코는 이 파놉티콘을 근대 권력의 은유로 사용하여 학교, 병원, 공장, 군대 모두 파놉티콘의 구조를 띠며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시선 아래 사람들은 스스로를 규율한다고 했지만, 한병철이 말하는 디지털 파놉티콘은 이와 다르다.


벤담의 파놉티콘에서 죄수들은 격리되어 있고 침묵을 강요당하며 감시당한다는 것을 알고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반면,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 즉 우리는 격렬하게 소통하고 자발적으로 말하며 감시를 즐기고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한병철의 표현을 빌리면 "디지털 빅브라더는 자신의 일을 수용소 주민들에게 떠넘기고"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감시하고, 스스로 데이터를 생산하고, 스스로를 전시하며, 좋아요 버튼은 바로 이 시스템의 핵심 장치다.


그렇기에, 표면적으로 좋아요는 자유의 상징으로 누구나 쉽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고 민주적이며 수평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검열이 없고 강제가 없어서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좋아요를 누른다. 마음에 드는 사진, 공감하는 글, 응원하고 싶은 친구에게 클릭 한 번, 간단하고 가벼운 이것이 좋아요의 빛나는 얼굴이다.


4.


그러나 뒤집어보면, 좋아요를 누르는 순간 내 위치가 기록되고 내 관심사가 분석되며 내 인간관계가 매핑되고 내 감정 상태가 추적되며 내 소비 패턴이 예측되어, 한 번의 클릭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나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플랫폼에 건네는 행위가 된다. 페이스북은 이를 '참여'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데이터 생산 노동'이며,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이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강요받지 않았고 오히려 즐겁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벤담의 간수는 죄수를 억지로 감금했지만 마크 저커버그는 나를 강제로 가두지 않고 내가 알아서 들어가고, 알아서 문을 잠근다.


5.


소셜미디어에서의 좋아요가 '놀이'라면, 플랫폼 노동에서의 좋아요는 '생존'이다, 배달라이더에게 고객의 별점은 숫자 그 이상으로 별 5개는 생계이고, 별 4개는 불안이며, 별 3개는 재앙이기에, 평점이 떨어지면 앱에서 배정받는 주문이 줄어들고 수입이 줄어든다. 그래서 라이더는 폭우에도 배달하고, 이상한 요구도 들어주며, 항상 웃고, 아파도 쉬지 못하는데, 한병철은 이를 "좋아요-자본주의"라 명명한다.


좋아요 버튼은 "스마트 권력의 인장"이라고 하는데, 스마트 권력은 명령하지 않고 금지하지도 않으며 대신 "친절하게" 유혹하고 자극한다. 전통적 권력이 "일해라!"라고 명령한다면, 스마트 권력은 "좋아요 받고 싶지?"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전자는 거부할 수 있고 명령에는 불복종의 여지가 있지만, 후자는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기에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내 욕망인데. 이것이 바로 한병철이 말하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역설이다.


6.


역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좋아요를 통해 타인을 평가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이 평가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올릴 사진을 신중하게 고르고, 필터를 여러 번 바꿔보며, 캡션을 고민하고, 해시태그를 전략적으로 달고, 업로드 시간을 계산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나는 나를 상품으로 만들고, 좋아요를 많이 받기 위해 나를 포장하고, 연출하고, 판매하며, 마케터가 브랜드를 관리하듯 나는 '나'라는 브랜드를 관리하는 것이다.


한병철의 표현으로는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경영자"이고, 경영자는 쉬지 못하며 항상 실적을 체크하고, 좋아요 숫자가 곧 나의 KPI여서 목표에 미달하면 자책하며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내가 매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하고, 실패의 책임은 언제나 나에게 돌아오며, 시스템을 의심하지 않고, 알고리즘이 불공정한가, 플랫폼이 나를 착취하는가 같은 질문은 하지 않고 대신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라고 다짐하게 된다.


한병철은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했고, 이것이 스마트 권력의 교묘함이며 저항의 대상이 없고 적이 보이지 않으며 내가 나를 착취하는데 누구를 원망하겠는가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한병철은 냉소적이어서 "자유를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새롭게 창안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묻지만 구체적 답은 주지 않는다.



7.


다만 그가 제시하는 방향은 관계적 자유로서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이고,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라고 했는데, 좋아요는 관계를 숫자로 환원하여 친구는 '팔로워 수'가 되고, 소통은 '좋아요 개수'가 되며, 질적인 것이 양적인 것으로 전환되고, 진짜 관계는 측정할 수 없어서 좋아요 100개보다 진심 어린 댓글 하나가 더 소중할 수 있고, 팔로워 1만 명보다 진짜 친구 한 명이 더 의미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숫자에 중독되어 있고 측정 가능한 것만이 가치 있다고 믿게 되었기에, 좋아요 버튼을 누를 때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이것은 진짜 공감인가 아니면 전략적 클릭인가, 이것은 자유로운 표현인가 아니면 자기 검열의 결과인가, 이것은 연결인가 아니면 고립인가를 묻게 된다.


한병철이 통찰했듯이 우리는 "서브젝트(주체, 예속된 자)에서 프로젝트(자기 기획자)로 이행"했으며, 겉보기에 우리는 자유롭고 아무도 우리를 억압하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획자이고, 경영자이고, 마케터이지만, 바로 이 자유가 새로운 예속의 형식이고, 우리는 주인 없는 노예이며, 더 정확히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주인이자 노예여서, 좋아요 버튼은 그 작은 상징이고, 클릭 한 번에 담긴 이 모든 역설, 자발적 감시, 능동적 복종, 즐거운 착취가 있다.



8.


디지털 파놉티콘은 벽도 없고 간수도 없는데 우리가 알아서 들어가고, 알아서 갇히고, 알아서 감시받는다. 그리고는 "나는 자유롭다"고?, 정말 그럴까, 다음번 좋아요를 누르기 전에 잠시 멈춰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 손가락의 움직임은 과연 누구의 의지인가.





2026.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