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책임의 법철학적 재구성

생각의 서고 53화

by 소는영

O. 들어가기에 앞서


본 연구는 입법자의 법적 책임, 즉 '입법책임(Legislatives Unrecht)'의 성립 가능성을 법철학적·비교법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전통적으로 입법행위는 '정치적 결정'이라는 본질과 '의회주권' 원칙에 따라 사법적 통제의 영역 밖에 놓여왔다. 그러나 현대 법치국가에서 입법자 역시 헌법에 기속되며, 헌법적 명령을 이행해야 할 '의무주체'로서의 지위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전통적 면책 논리는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본고는 세 가지 핵심 축을 중심으로 논증을 전개한다.


첫째,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이유제시의무(Begründungspflicht)' 법리와 헌법불합치 결정의 '개선입법의무'를 통해 입법자의 '이중적 헌법적 의무' 구조를 정립한다.

둘째, 프랑스의 La Fleurette 판결, EU의 Francovich 판결, 캐나다의 Canada v. Power 판결 등 비교법적 분석을 통해 입법행위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의 국제적 동향을 검토한다.

셋째, 라드브루흐 공식과 '참을 수 없는 부정의(unerträgliches Unrecht)' 개념을 원용하여, 형식적 합법성을 갖춘 '법률적 불법(gesetzliches Unrecht)'에 대한 사법적 통제 가능성을 모색한다.


결론적으로, 입법자의 '사전적 이유제시의무'와 '사후적 개선입법의무'의 불이행이 명백한 경우, 또는 입법이 '악의(bad faith)'나 '권한남용(abuse of power)'에 기인한 경우, 이는 더 이상 정치적 재량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며 '구체적 헌법적 의무'의 위반으로서 국가배상책임의 '위법성' 요건을 충족할 수 있음을 시론적으로 제시한다.


주제어: 입법책임, 국가배상, 이유제시의무, 라드브루흐 공식, 법률적 불법, 헌법불합치



I. 서론: 문제의 제기


입법자가 입법한 법률이 객관적으로 외관상 법률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그 내용이 반헌법적이라면 어떠한가? 나아가 관련 전문가집단, 시민집단, 당사자, 심지어 법률전문가조차도 위헌성이 문제될 수 있다고 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입법자가 법률을 제정하였고, 이후 위헌심사가 이루어져 실제로 위헌선언이 내려졌다면, 그때 비로소 입법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전통적으로 입법행위는 헌법 제40조가 천명하는 국회의 고유한 권한이며, 그 본질은 주권자의 정치적 의사를 결집하는 고도의 '정치적 결정(Gesetzgebung)'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입법행위의 정치적 본질은 입법이 행정이나 사법과 달리 법률을 집행(Gesetzesvollzug)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입법자를 사법적 통제, 특히 국가배상책임(Staatshaftung)의 영역에서 면책시키는 핵심적인 논거로 기능하여 왔다. 이를 통하여, '입법형성의 자유'라는 이름 하에 입법자의 재량은 광범위하게 인정되었으며, 그 재량의 행사에 대한 책임 추궁은 법률적 책임이 아닌 다음 선거를 통한 정치적 책임의 문제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대 법치국가(Rechtsstaat)의 헌법질서 하에서 입법자 역시 헌법에 기속되며, 헌법 제10조가 규정하는 국가의 기본권 보장의무는 모든 국가기관, 특히 입법자에게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고 구체화할 적극적 의무를 부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입법자는 더 이상 무한한 재량을 향유하는 '권한보유자'에 머무르지 않으며, 헌법적 명령을 이행해야 하는 '헌법적 의무 이행자'로서의 지위를 병존적으로 갖게 된다. 헌법재판소가 입법자의 법률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리는 것은 입법자가 이러한 헌법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음에 대한 사법적 확인이다.


본고의 목적은 이처럼 이중적 지위를 가지는 입법자의 입법행위에 대한 국가배상책임, 즉 '입법책임'의 성립 가능성을 탐구함에 있어, 그 핵심요건인 '위법성(Rechtswidrigkeit)'을 판단하기 위한 논리적 전단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입법자의 광범위한 형성권으로 인해 위법성 판단이 극도로 어려운 입법 영역에서, 어떠한 기준과 방법론을 통해 입법자의 '구체적 헌법적 의무' 위반을 확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본 연구의 핵심이다.


II. 입법행위와 국가배상책임에 관한 비교법적 검토



1. 서설: 입법자의 전통적 면책과 그 한계


입법행위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의 인정 여부는 각국의 헌법체계와 법전통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보인다.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법체계에서 입법자는 '의회주권(Parliamentary Sovereignty)'과 '권력분립' 원칙에 따라 광범위한 면책특권을 향유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면책 논리는 위헌법률심사제도의 발전과 인권 보장의 강화 추세에 따라 점진적으로 수정되고 있다.



2. 프랑스: 무과실 책임과 La Fleurette 판결


프랑스 행정법은 '공적 부담 앞의 평등(Égalité devant les charges publiques)' 원칙에 기초하여, 적법한 법률로 인한 손해에 대해서도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는 독특한 법리를 발전시켜왔다. 1938년 국사원(Conseil d'État)의 Société Anonyme des produits laitiers 'La Fleurette' 판결은 이러한 법리의 효시가 되는 역사적 판결이다.


이 사건에서 국사원은 인조 크림 생산을 금지하는 법률로 인해 '라 플뢰레트' 회사가 입은 손해에 대해, 해당 법률이 공익을 위한 적법한 입법임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이고 특별한 손해(préjudice anormal et spécial)'를 야기하였다는 이유로 국가의 무과실 배상책임을 인정하였다. 이 판결의 핵심은 입법행위의 위법성을 요건으로 하지 않고, 손해의 특별성만으로 배상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 있다. 권세훈(2013)은 이러한 프랑스의 무과실책임 법리가 과실 책임을 원칙으로 하는 한국의 국가배상 체계와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상세히 분석하였다.



3. 유럽연합: Francovich 판결과 입법부작위 책임


유럽연합 차원에서는 1991년 유럽사법재판소(ECJ)의 Francovich and Bonifaci v. Italy 판결(Joined Cases C-6/90 and C-9/90)회원국의 입법부작위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한 획기적인 선례로 평가된다.


이 사건에서 ECJ는 이탈리아가 근로자보호에 관한 EU 지침(Directive 80/987/EEC)을 국내법으로 이행하지 않아 근로자들이 손해를 입은 경우, 해당 국가가 배상책임을 진다고 판시하였다. 판결의 핵심 법리는 다음과 같다: EU 지침이 개인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권리의 내용이 지침의 규정으로부터 확정될 수 있으며, 지침의 미이행과 개인이 입은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 국가배상책임이 성립한다. Wade(1996)는 이 판결이 회원국의 입법행위 책임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면서, 이것이 의회주권의 전통적 관념에 대한 중대한 도전임을 지적하였다.




4. 캐나다: Canada v. Power 판결과 악의적 입법에 대한 책임


가장 최근의 주목할 만한 발전은 2024년 7월 캐나다 연방대법원의 Canada (Attorney General) v. Power (2024 SCC 26) 판결이다. 임기영(2025)이 상세히 소개한 이 판결은 입법부가 명백히 위헌적이거나 악의적인 법률을 제정했을 때 국가가 배상책임을 질 수 있다는 선진 법리를 천명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의 원고 Joseph Power는 범죄 기록 유예(record suspension) 신청 자격이 있었으나, 캐나다 의회가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여 이를 소급적용함으로써 신청이 영구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법원은 해당 법률 조항이 소급처벌금지원칙 등을 위반하여 위헌이라고 선언하였고, 원고는 위헌적 법률의 '제정(enactment)' 행위 자체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캐나다 연방대법원은 5대 4의 결정으로 정부의 절대적 면책권 주장기각하였다. 다수의견(Wagner 대법원장 등)은 의회주권이나 권력분립이 입법부의 자율성을 보호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헌법 위반이나 국민의 권리 침해에 대한 책임까지 무한정 면제해주는 방패가 될 수는 없다고 판시하였다. 대법원은 다음 세 가지 경우에 국가배상책임이 성립할 수 있다고 기준을 제시하였다:


첫째, 입법 당시 명백히 위헌적인(clearly unconstitutional) 경우,
둘째, 악의(bad faith)가 있는 경우,
셋째, 권한남용(abuse of power)이 있는 경우




5. 대한민국: 행정입법 부작위에 대한 최근 판례의 전향적 태도


대한민국에서는 대법원 1997. 6. 13. 선고 96다56115 판결이 국회의원의 입법행위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의 일반적성립 요건(객관적 위법성, 주관적 과실)을 설시한 리딩케이스로 기능하여 왔다. 이 판결은 입법행위의 국가배상책임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하여, 사실상 그 성립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대법원 2024. 12. 19. 선고 2022다289051 전원합의체 판결은 '행정입법 부작위'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행정청이 정당한 이유 없이 장애인 접근권 보장을 위한 시행령 입법을 지체한 경우, 그 부작위가 위법하며 국가배상책임이 성립한다고 인정하였다. 정남철(2025)은 이 판결이 입법 의무의 도출 근거와 국가배상 성립 요건에 관하여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몇 가지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 판결은 비록 행정입법에 관한 것이지만, 국회의 입법부작위 논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선례로 주목된다.



III. 입법자의 헌법적 의무의 이중 구조




1. 사전적 절차적 의무: 이유제시의무(Begründungspflicht)


입법행위는 헌법의 집행이라기보다는 헌법의 윤곽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차적인 가치판단이자 '정치적 결정'이다. 입법자는 헌법이 설정한 '윤곽규범(Rahmenordnung)' 내에서 광범위한 '입법형성권'을 향유한다. 이러한 입법행위의 본질상, 입법자는 원칙적으로 행정이나 사법과 동일한 수준의 '이유를 제시할 일반적 의무(allgemeine Begründungspflicht)'를 부담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 연방헌법재판소(BVerfG)는 특정한 헌법적 과제를 이행하는 입법자에게 예외적으로 고도의 '설명의무' 내지 '이유제시의무'를 부과하는 법리를 발전시켜 왔다. 배중화(2023)는 이러한 예외적 의무가 헌법적 심사기준 자체가 '불확정 개념(unbestimmter Begriff)'으로 구성되어 있거나, 헌법적 의무의 이행 기준이 불명확한 경우에 발생한다고 분석한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세 가지 유형의 사안에서 이러한 의무를 구체화하였다.


첫째, 국가채무(Staatsschulden) 영역에서 예산입법자에게 그 근거를 설명할 의무를 부과하였다(BVerfGE 79, 311).

둘째, 사회적 기본권(soziale Grundrechte) 영역에서 이른바 '하르츠 IV(Hartz IV)' 판결(BVerfGE 125, 175)을 통해 입법자가 산정한 최저생계비의 산정 과정이 '신뢰할 수 있는 숫자(verlässliche Zahlen)'와 '신뢰성 있는 산정과정(nachvollziehbares Berechnungsverfahren)'에 근거하였는지를 입법자가 입증하도록 요구하였다.

셋째, 공무원의 '부양의 원칙(Alimentationsprinzip)' 영역에서 보수 책정의 근거와 기준을 설명하도록 하였다(BVerfGE 130, 263).


이러한 법리의 핵심은 '절차적 통제'에 있다. 헌법재판소가 입법자의 실체적 판단을 직접 심사하여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에 이르는 '절차' 및 '방법'의 합헌성을 통제하는 것이다. 하르츠 IV 판결에서 급부 수준이 '명백히 불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산정절차' 자체의 흠결만으로 헌법에 위반될 수 있다고 판시한 점이 이를 명확히 뒷받침한다.




2. 사후적 교정적 의무: 개선입법의무


입법자의 헌법적 의무는 입법 과정에서의 '사전적 의무'로만 그치지 않는다. 최윤철(2012)이 강조하듯이, 입법자는 헌법 제10조(국민의 기본권 보장 의무)와 제37조 제2항(기본권 제한의 한계) 등에 근거하여 '적극적 입법의무'를 부담하는 '의무자'로서의 지위를 갖는다. 헌법은 입법자에게 행위의 지침이자 한계인 '행위규범(Verhaltensnorm)'으로 작용하며, 헌법재판소에게는 입법자의 행위가 그 한계를 준수했는지를 판단하는 '재판규범(Kontrollnorm)'으로 작용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결정 형태는 '헌법불합치' 결정이다. 헌법불합치 결정은 해당 법률이 '실질적으로 위헌'임을 선언하면서도, 그 법률의 즉각적인 효력 상실로 인한 법적 공백을 방지하기 위해 입법자에게 시정을 명하는 결정이다. 이 결정은 헌법재판소법 제47조 제1항에 따라 모든 국가기관, 특히 입법자를 '기속'한다.

헌법불합치 결정의 기속력은 입법자에게 '위헌적 상태'를 제거하고 '합헌적 상태를 회복'해야 할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입법의무'를 부과한다. 이는 입법자가 재량을 가지는 일반적인 입법의무가 아니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해 그 이행이 강제되는 '사후적 개선입법의무(ex-post-Verbesserungspflicht)'이다. 헌법재판소는 동성동본 금혼 규정(헌재 1997. 7. 16. 95헌가6)이나 재산세 과세표준(헌재 2004. 1. 29. 2002헌바40) 사례에서처럼 입법자에게 '개선 시한'을 명시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이 의무의 이행을 강제하였다.




3. 이중적 의무와 위법성 판단의 연관성


입법자의 국가배상책임이 성립하기 위한 핵심 요건은 입법행위의 '위법성'이다. 전통적으로 입법자의 광범위한 '정치적 재량(politisches Ermessen)' 영역으로 간주되어 위법성 판단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영역에서, 이상의 두 가지 '구체적 헌법적 의무'는 위법성 판단의 명확한 시금석을 제공한다.


'사전적 이유제시의무'의 불이행(예컨대, 신뢰할 만한 통계나 합리적 산정 과정 없이 최저생계비를 자의적으로 산정하는 행위) 또는 '사후적 개선입법의무'의 불이행(예컨대, 헌법재판소가 부여한 개선 시한 내에 헌법불합치 법률을 개정하지 않는 입법부작위)은 더 이상 입법자의 '정치적 재량' 영역에 속하지 않으며, '구체적 헌법적 의무'의 명백한 '위반'을 구성한다.


이러한 의무 불이행을 확정하는 것은 향후 입법자의 작위 또는 부작위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의 '위법성' 요건을 충족시키는 핵심적인 '논리적 전단계'로서 기능할 수 있다.



IV. 법률적 불법(gesetzliches Unrecht)과 사법적 통제의 가능성



1. 민주주의의 역설과 다수의 횡포


민주주의는 '인민의 지배(demos-kratos)'라는 숭고한 이념에서 출발하였으나, 현실 정치의 작동 원리에 있어서는 종종 절차적 기제인 '다수의 지배'로 환원된다. 임화연(2006)은 민주주의가 단순히 '다수의 지배'로 이해될 때, 이는 일인이나 소수의 지배와 다를 바 없는 전제의 한 형태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임화연은 토크빌(A. Tocqueville)의 통찰을 원용하여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가 갖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토크빌은 "어느 한 사람에게 전능의 권한을 부여해서는 안 되는 것과 꼭 같은 이유에서 여러 사람(다수)에게도 그런 권한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나아가 존 스튜어트 밀이 우려했던 '사회적 전제(Social Tyranny)'의 개념을 통해, 사회의 지배적인 여론이나 감정이 법률적 제재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개인의 사상과 행동을 통제하는 현상의 위험성을 분석한다.




2. 국민주권 정당화 논리의 허구성


오충환(2011)은 '국민주권을 통치권의 정당화 원리로 보는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국가권력의 정당성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통치행위는 이념적으로 국민의 의사에 귀착된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권력자의 행위는 곧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므로 정당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오충환은 이 이론이 '국민'을 실재하는 존재가 아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크기(ideological size)로 왜곡한다고 지적한다. 현실의 권력자는 자신들의 통치 행위를 '추상적 국민'의 의사로 포장하여 정당화할 수 있게 되며, 실제 권력은 대표가 독점하면서도 그 책임은 '국민의 뜻'으로 돌리는 모순적인 구조가 형성된다.


오충환은 국민의 '의사(Will)'와 '이익(Interest)'을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권력자들이 여론조사 결과나 다수의 지지를 '국민의 의사'라고 포장하더라도, 그것이 일시적 감정이나 조작된 여론에 기인한 것이라면 국민의 진정한 '이익'과 배치될 수 있다. 따라서 대표와 국민의 관계에서 '무기속위임(자유위임)' 원칙을 폐기하고 '기속위임' 원칙을 도입해야 하며, 대표가 기속되어야 할 대상은 변덕스러운 '국민의 의사'가 아니라 국민의 궁극적인 '이익'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라드브루흐 공식과 참을 수 없는 부정의


입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실천적 방법론은 '무엇이 정의로운가'라는 적극적 기준을 설정하는 것보다 '무엇이 명백히 부정의한가'라는 소극적 기준을 확립하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김대휘가 지적하듯이 "무엇이 정의로운지는 합의하기 어려워도 무엇이 부정의한지 합의가 가능"하며, 이것이 '비판적 법실증주의'의 핵심적 단초로서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명백한 부정의'를 식별하는 가장 저명한 법이론적 도구는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sche Formel)'이다. 최봉철(2020)의 분석에 따르면, 라드브루흐는 법적 안정성(Rechtssicherheit)이 그 자체로 중요한 법이념이지만, 실정법과 정의의 충돌이 '참을 수 없는 부정의(unerträgliches Unrecht)'의 정도에 이르게 되면, 그 법률은 '법률적 불법(gesetzliches Unrecht)'으로서 정의에 후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악한 법의 효력 문제는 나치 청산 과정에서 실제 재판의 쟁점이 되었다. 최봉철이 소개한 1949년 밤베르크 고등법원의 '악의의 밀고자 사건(Grudge Informer Case)' 판결은 "어떤 행위가 실정법의 권위에 따라 행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가 모든 온전한 사람들의 공정성과 정의에 관한 감정을 위반하였을 때 그 행위는 불법"이라고 판시하였다. 이는 다수의 지배하에 만들어진 사악한 법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보편적 양심과 정의감에 비추어 그 효력과 적용이 제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4. 전체 법질서(Gesamte Rechtsordnung)와 사법적 통제


대법원 판례에서 나타나는 '전체 법질서' 개념은 입법행위에 대한 사법적 통제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대법원은 민법 제750조의 불법행위 요건인 위법행위는 특정 법률규정을 위반한다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고 '전체 법질서'의 관점에서 사회통념상 위법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가리키는 탄력적인 개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법의 '일반조항(Generalklausel)'이 입법권 남용에 대한 사법적 통제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 정상민이 강조한 민법 제2조의 '신의성실의 원칙(Treu und Glauben)'과 김대휘가 강조한 '법원리(Rechtsprinzip)'는 '헌법적 가치의 진입통로'로서 "법률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일반 원칙들은 "실정법을 형식적이고 엄격하게 적용할 때 생길 수 있는 부당한 결과"를 시정하는 사법적 통제 메커니즘으로 작동할 수 있다.


V. 입법책임의 구체적 구성: 국가폭력론과 간접정범 이론의 원용



1. 입법행위의 국가폭력(Staatsgewalt)으로의 재개념화


사법적 통제가 실패하고 '법률적 불법'이 현실화되어 형사사법 시스템의 붕괴와 같은 국가조직 자체에 대한 훼손이 발생했을 때, 입법자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이는 전통적인 국가배상이론이나 입법자의 면책특권(Immunität) 이론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법철학적 난제이다.


김성돈이 제시한 이론을 차용하면, 입법행위를 '국가폭력(Staatsgewalt)'으로 재개념화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획할 수 있다. 김성돈에 따르면, 국가가 스스로 "불법한 공권력"을 행사하여 "국민(시민)의 법익을 침해하는 경우", 즉 '국가폭력'을 자행할 때, 국가는 자신이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는 헌법적 지침의 보호 대상이 될 수 없다.


'입법권 남용'으로 규정한 행위, 즉 '법률적 불법'에 해당하는 입법행위는 단순한 '위헌적 입법(verfassungswidrige Gesetzgebung)'을 넘어 '국가폭력'의 한 형태로 파악될 수 있다. 이는 국가의 핵심 의무(예컨대 형사사법 시스템의 유지 및 보호)를 고의로 파괴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성돈은 '국가폭력'의 주체에게는 일반 '시민형법(Bürgerstrafrecht)'이 아닌, 헌법적 보호 장치가 제거된 '리바이어던 형법(Leviathan-Strafrecht)'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간접정범(mittelbare Täterschaft) 이론의 원용


입법자는 "나는 단지 법률안에 투표했을 뿐, 시스템 붕괴라는 피해를 직접 야기하지 않았다"고 항변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김성돈이 제시한 '간접정범(mittelbare Täterschaft)' 이론이 분석틀을 제공한다. 김성돈에 따르면, 간접정범의 본질은 '우월적 의사지배(überlegene Willensherrschaft)'에 있다.


이 간접정범 개념을 입법자에 적용하면, 입법자는 '배후의 정범(Täter hinter dem Täter)'으로서 자신의 우월적 지위(입법권)를 이용하여 의사지배를 행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입법자가 이용한 '도구'는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정치권력에 굴복한 행정부, 또는 그 기능이 왜곡된 국가기관 자체가 될 것이다. 입법자는 이러한 '도구'를 통해 국가적 피해를 야기할 것임을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를 감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구체적 사례에의 적용: 검찰개혁 입법의 검토


김성룡(2025)은 2025년 검찰청 폐지 및 공소청 신설안이 전문가 집단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일방통행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입법 발의자들이 '세계 주요 민주국가들이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유럽평의회(CEPEJ) 자료에 따르면 46개국 중 38개국(82.6%)이 검사의 직접 수사나 수사지휘권을 인정하고 있어, 이러한 주장은 사실 왜곡에 기반한 것이다.


박성호(2022) 역시 해당 입법 과정을 "검찰 수사 무마를 위한 권력 목적의 법률 개정"이자 "졸속 입법"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하였다. 입법자들이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몰랐다면 '중대한 과실'이며, 알고도 왜곡했다면 명백한 '악의(Bad Faith)'이다. 이는 Canada v. Power 판결에서 설시한 국가배상책임의 요건에 부합하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


VI. 제도적 대안: 입법통제 시스템의 구축



1. (가칭) 의원법률안검토위원회의 신설


김성룡은 졸속입법을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으로 '의원법률안검토위원회'의 설립을 제안한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체계·자구 심사 기능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휘둘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입법 절차의 초기 단계에 전문적인 필터링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구성은 정년 퇴임한 법학교수, 현직 정교수, 관련 분야의 연구자 및 실무가 등 고도의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갖춘 인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수행 기능은 국회의원 발의 법안이나 정부 제출 법안에 대해 헌법적 정합성, 체계적 통일성, 자구의 명확성 등을 전문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며, 특히 입법의 전제가 되는 사실관계(예컨대 해외 입법례 통계 등)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여 '가짜 뉴스'에 기반한 입법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 위원회의 검토는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절차'로 규정되어야 하며, 법안이 국회 본회의나 소관 상임위원회에 상정되기 전에 반드시 이 위원회의 검토 보고서를 첨부하도록 하여야 한다.



2. 기속위임 원칙의 도입과 국민소환제 활성화


오충환의 제안대로, 대표와 국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헌법해석상 통용되던 '자유위임' 원칙은 대표가 선거 때만 국민을 위하는 척하고 당선 후에는 당리당략이나 사익을 추구하는 것을 방조하는 면죄부가 되어왔다. 이를 '기속위임'으로 전환하여, 대표가 국민의 진정한 이익(헌법적 가치와 기본권)에 구속되도록 해야 한다.


더불어 '국민소환제'를 도입하여 정치적 책임을 법적책임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악의적인 입법을 주도하여 헌법 질서를 문란하게 하거나 국민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힌 입법자에 대해서는, 다음 선거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임기 중이라도 소환하여 그 직을 박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입법자들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되어 무분별한 입법 폭주를 제어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VII. 결론


본고는 입법자의 국가배상책임, 즉 '입법책임(Legislatives Unrecht)'의 성립 가능성을 법철학적·비교법적 관점에서 탐구하였다. 이를 위해 입법자의 '구체적 헌법적 의무'를 확정하는 과정을 검토하였으며, 그 결과 입법자의 '헌법적 의무'는 '사전적·절차적 의무(이유제시의무)'와 '사후적·교정적 의무(개선입법의무)'라는 이중적 구조로 체계화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비교법적 검토를 통해, 프랑스의 La Fleurette 판결이 제시한 무과실 책임 법리, EU의 Francovich 판결이 확립한 입법부작위 책임, 그리고 캐나다의 Canada v. Power 판결이 천명한 악의적 입법에 대한 배상책임 법리를 확인하였다. 특히 캐나다 판결이 제시한 '명백한 위헌성', '악의', '권한남용'이라는 세 가지 책임 요건은 한국의 입법책임론 구성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나아가 라드브루흐 공식과 '참을 수 없는 부정의' 개념을 통해, 형식적 합법성을 갖춘 '법률적 불법'에 대한 사법적 통제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전체 법질서' 개념과 일반조항이 '헌법적 가치의 진입통로'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김성돈의 '국가폭력' 이론과 '간접정범' 이론을 원용하여 입법자를 '배후의 정범'으로 포착할 수 있는 이론적 단초를 마련하였다.


결론적으로, 입법자의 '사전적 이유제시의무'와 '사후적 개선입법의무'의 불이행이야말로 입법자의 '위법성'을 구성하는 핵심 논거가 될 수 있다. 이는 입법자의 '정치적 결정'을 '헌법적 의무'의 영역으로 포섭하고, 입법책임을 법적으로 구성하는 결정적 논거가 될 것이다. 다만, 향후 입법자의 '고의' 또는 '악의적 목적'을 입증할 법방법론, 그리고 '입법부작위'가 아닌 '악의적 입법행위'에 대한 국가배상 및 형사책임의 구체적 성립 요건에 관하여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다수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오만함 "헌법과 국민의 이익 앞에서는 다수도 겸손해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지혜로 대체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2026.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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