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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윤 Feb 06. 2023

영어인 줄 알았는데 IT 직장인 사투리

처음엔 그냥 외래어인 줄 알았습니다.

"앞으로 이 프로젝트인볼브해줬으면 좋겠어요. 아직까지는 러프한 기획안 뿐인데 애자일하게 갈거니까 다방면으로 공부해두면 도움이 될거야. 전부 컨펌받을 필요 없고 이슈 생기면 그 때만 이야기해줘요. 우리 고객의 니즈와도 회사 마일스톤과도 일치하는 프로젝트니 스스로 케파를 키워보자고. 마침 연말이니 플로우 한 번 읽어보고 KPI 세워봐요. 맨먼스 계산하고 기존에 하고 있던 업무랑 리소스 분배 잘 해서 다음 주까지 봅시다."


어떤가? 만약 한 번에 술술 읽혔다면 아마도 당신은 IT 업계 혹은 스타트업에 종사하는 직장인일 가능성이 크다. 이건 단순한 외래어나 외국어의 모음이 아니다. 한 때 판교 사투리로 불리웠던 IT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직장 상사의 업무 지시 현장이다. (혹시 뜻이 궁금하다면 글 하단에 적어두었다.)



나는 2번을 이직하며 서로 다른 2가지 언어를 배웠다.


뚫린 귀는 왜 듣지를 못하나

잠시 여담이다. 2018년도,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하며 가장 빠르게 맞닥뜨렸던 위기가 바로 '언어'였다. 입사 전 패기로 나름대로 네이버에 '수술실 의학용어'를 검색해 어느 정도 암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나에게 외계어처럼 들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웃픈 생각이지만 나는 그 때 정말로 이 모자가 너무 싫었다. 머리카락 한 올 안 나오게 집어 넣어 못 생겨보이는 것 때문도 아니고 고무줄로 이마가 눌려 시뻘건 선이 생겨서도 아닌, 저 얇은 천이 내 귀를 막아 그마저 조금 들리는 것들까지 막아버리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한 달이 지나자 "라파(laparoscopy, 복강경 검사)지만 오픈(open, 개복) 가능성 있어서 수파인(supine, 반드시 누운 자세)으로 준비해주세요. 바로 프로즌(frozen, 동결절편검사) 나가요." 등과 같은 빈번하게 쓰이는 것들은 알아듣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모기'와 '보비'처럼 모음이 비슷한 단어들은 빠릿하게 알아채지 못해 핀잔을 듣기 일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이상은 들을 수가 없더라. 베테랑 선생님들조차 상황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안 들리는 건 아닌데 안 들려

두번째 직장인 IT 스타트업에 갔을 때 처음 대학병원 수술실에 갔을 때 만큼이나 도통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분명 안 들리는 건 아닌데, 안 들리는 기분. 의학용어처럼 영 생소한 단어도 아니고 말을 하는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이해를 못 하는 것인가. 다들 끄덕끄덕하는 거 보니 못 알아듣는 건 나 뿐인 듯 했고, 차마 손을 번쩍 들어 "케파가 뭔가요?"라고 물을 용기는 없었다.



사투리는 모르는 새 스며든다.


그렇게 하나씩 궁금해하며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나 또한 IT 사투리에 잠식당했다. 만 1년이 지나니 스물스물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경계심이 들기도 했다. 내가 과연 이 단어들을 올바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게 맞나? 상대방은 내 의도에 맞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할 수 있는 한국어가 엄연히 있음에도 왜 사투리로 대화하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질까?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점점 내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과 같은 언어로 소통한다는 것에서 소속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화가 되어버린 IT 사투리


문화란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이나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되어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한 물질적, 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루는 말이다.


혹자는 외국인이나 교포가 아닌 순수 토종 한국인이 IT 사투리를 남발하는 모습을 보고 단순한 허세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내가 이 생태계에서 길지 않은 시간동안 느낀 것은 IT 사투리는 단순히 영어가 아닌 집단의 유대를 형성하는 문화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순우리말 사용을 지향하는 문화도 좋다.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한 전 세대의 노력은 지금도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IT 업계의 발전에 따라 그 생태계 속에서 새로이 생겨난 이 사투리는 같은 업무 환경에 놓이고 놓일 이들이 답습함에 따라 쉬이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될테니 어쩌겠는가? 언어란 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뭐든지 상황에 따라 가장 빠르고 편리하게 진화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간혹 소통의 오류를 해소해주기도 한다.

추가로 한 마디 얹어보자면, 아무래도 IT 회사(특히 스타트업)에서는 한국어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는 낼 수 있는 느낌에 한계가 있거나 극단적으로 들리는 사례들이 종종 있다. 예컨데, 'Fancy함'을 전달하고 싶은데 '멋짐', '개성있음', '끌림' 등으로는 그 느낌이 잘 살지 않는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간지남'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편하게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게 될 때가 있다. "회사 잘 성장시켜서 다같이 엑시트해야지!"라는 말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으나 "회사 잘 성장시켜서 다 같이 투자금 회수하고 떠나야지!"라고 한다면 듣는 이에 따라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앞서 예시로 나왔던 IT 사투리 예시 몇 가지에 대한 해석도 함께 달아본다. 물론 회사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쓰일 수 있음은 참고하길!


* 프로젝트(project)

* 인볼브(involve)하다 : (대체로 중요한 일에) 참여하다

* 러프한(rough)한 : 환경과 상황에 맞춰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방식 / 필요에 따라 협업하는 자율적인 팀을 조직하고 개인에게 오너십을 부여하는 수평적인 방식

* 컨펌(confirm)받다 : 확인 받다

* 이슈(issue) : 계획에 없던 일, 예상하지 못한 일

* 니즈(needs) : 상대방의 필요성, 요구 사항

* 마일스톤(milestone) : 프로젝트 타임라인 중 특정 지점 / 단기적 목표

* 케파(capacity) : 역량, 업무수행능력

* 플로우(flow) : 프로젝트 또는 일이 진행되는 흐름

* KPI(Key Performance Indicator) : 핵심 성과 지표, 정량적 또는 정성적으로 개인이나 업무에 대해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지표)

* 맨먼스(man-month) : 한 사람이 한 달동안 할 수 있는 일의 양

* 리소스(resource) : 프로젝트 또는 일에 투여되는 노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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