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어젯밤 예진의 친구 세레나가 집에 왔다. 그는 업무 차 울란바토르 근처 소도시에 머무는데 주말을 맞아 울란바토르에 왔다.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미리 예매했고 셋이서 함께 보기로 했다.
예진과 세레나는 근황을 주고받았다. 세레나는 미국에서 몽골로 왔을 때부터 매주 박물관, 미술관, 극장 중 한 곳을 꼭 간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국립 박물관이나 현대 미술관 같은 유명한 곳뿐만 아니라 퍼즐 박물관처럼 독특한 곳과 숨겨진 카페, 비건 식당들을 알고 있었다. 먼 거리도 걸어 다녀서 주변 지리를 통해 위치를 설명했다. 그에게 몽골은 사회 문화적인 지도 형태로 기억될 것 같았다. 친구 집에 얹혀살기로 하고 비행기와 투어만 끊어서 온 몽골 베짱이로서 구글 지도에 세레나의 발자취를 남겨두었다.
과거 여행지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는 여행지를 어떻게 기억하더라. 관광지의 풍경으로? 유명한 맛집의 음식으로? 돌아오고 남은 사진으로? 기억 속 온갖 카테고리들이 뒤섞였다.
예진표 김치볶음밥과 콩나물국을 아침으로 먹고 나섰다. 저녁 공연을 보기 전 나랑톨 시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둘은 길에서 익숙하게 무허가 택시를 잡았다. 역시나 택시 표시가 없는 차들이 간간히 우리 앞에 섰다. 목적지까지의 가격을 듣고 한두 대 돌려보내다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는 택시에 탔다.
택시 기사님들은 몽골어로 말하셨다. 둘은 몽골에 오래 체류하다 보니 선택적으로 몽골어를 할 줄 알았다. 주로 세레나는 가격이나 간단한 단어들을 알아들었고 예진은 목적지를 말하며 가격을 흥정하곤 내릴 곳을 안내했다. (얼마나 든든했는지...! 생각해 보면 5주나 몽골에 있으면서 첫날 이후로 혼자서는 택시를 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가니 나랑톨 시장이 있었다. 네모나게 정렬된 회색 도시 속 전통 시장의 존재가 생기 있게 다가왔다. 문을 지나 들어가니 고속도로에서 들을 법한 트로트 바이브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된 음악에서 오래전부터 들어온 것 같은 정겨움을 느꼈다.
빛이 바랜 큰 천막들 아래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러 계절감을 띤 옷부터 신발, 식기, 생필품 등 다양했다. 한국의 전통 시장처럼 불규칙한 골목들 사이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손님에게 물건을 설명하는 주인, 옆 가게 주인과 담소를 나누는 상인, 바쁘게 물건을 나르는 사람, 꼼꼼히 상품을 비교하는 사람, 가족 단위로 구경을 나온 사람들, 관광객들까지 각자의 목적으로 시장을 채우고 있었다.
친구들은 붐비는 곳에서 돈과 휴대폰을 조심하라고 했다. 몽골에 와서 처음으로 목에 걸고 온 카메라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카메라 그립을 움켜쥐곤 주머니 속 물건들을 확인했다.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된 것 같아 한껏 긴장한 채 친구들의 뒤를 쫓았다.
물건은 종류만큼이나 출처가 다양했다. 한국 유통 업체 이름이 적힌 박스가 있는 걸 보니 한국을 거친 물건도 있는 것 같았다.
몽골 전통 의상 '델'이 늘어선 골목에 들어섰다. 두꺼운 소재의 긴 옷에 앞을 여미는 섶이 있고 허리띠를 두르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전통적인 델도 있었고 현대적으로 계량된 얇은 랩원피스 형식의 델도 있었다.
델마다 커프스가 포인트인 것 같았다. 추위에 손을 가리기 위함이 본래의 용도겠지만 전통 문양이 새겨진 것이나 레이스 형태로 늘어진 것은 보기에도 예뻤다.
몽골은 겨울이 춥다 보니 5월~8월 여름에 졸업식, 결혼식, 나담 축제 등 중요한 행사가 몰려있다. 다가올 시기에 대비해 델을 맞추는 현지인들이 꽤 있었다. 울란바토르를 걷다 보면 일상에서 델을 입고 있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세레나는 델을 하나 가지고 있고 예진도 몽골을 떠나기 전 하나 맞추고 싶다고 했다. 천천히 둘러보다 건진 건 세레나의 선글라스뿐이었지만 외국 시장에서 색색의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천막 아래 있던 상점들 옆으로 갈색 벽돌로 된 건물이 있었다. 실내 시장이라고 해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층별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유리벽이나 진열대로 상점이 나누어져 있었다. 베이커리나 양념류, 유제품 등 종류 별로 여러 상점이 한꺼번에 늘어선 큰 공간도 있었다. 물건은 야외 시장과 비슷했는데 가격은 조금 더 비싼 것 같았다.
현지식을 파는 푸드코트 공간도 있었다. 육류 위주의 음식들이었다. 궁금했지만 길거리 음식보다는 본격 식사 느낌이라 지나치기로 했다. 곧 다가올 시외 투어에서 현지식을 많이 먹을 거라 아쉬움 없이 발길을 돌렸다.
식품이 진열된 곳에 소스만 파는 구역이 있었다. 중간중간 고추장, 간장, 다시다, 식용유 등 한국 식재료도 섞여있었다. 몽골 곳곳에서 한국 제품을 찾을 수 있어서 반가웠다.
베이커리에는 전통 빵과 케이크와 간식들이 있었다. 예진은 몽골의 설날인 차강사르 때 기다란 빵 '버브'를 탑 모양으로 쌓아둔다고 했다.
가장 유명한 건 유제품이었다. 유제품 코너는 들어가자마자 꼬릿꼬릿하고 강렬한 치즈 냄새가 났다. 초원에서 목축하는 동물들의 젖으로 치즈, 우유, 요구르트, 과자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본 적 있는 '아롤'이 무슨 맛인지 물어봤다. 아롤은 우유를 발효시켜 말린 과자인데, 보통 치즈와 비슷한 맛이 나고 설탕을 넣어 달달한 것도 있다고 했다. 친구들의 입맛에는 그리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공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시장을 나왔다. 국립 오페라 발레 극장은 중심가에 있어 다시 택시를 잡았다.
극장은 붉은색 페인트칠이 된 유럽 풍의 건물이었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수흐바타르 광장은 평소보다 분주했다. 프랑스 대통령의 방문을 맞아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입장을 기다렸다. 발레 공연을 보는 건 처음이라 설렜다. 셋 다 <백조의 호수>의 음악이나 줄거리를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어 속성으로 찾아보았다. 발레는 말을 하지 않고 몸짓으로 소통하는 예술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공연 시간이 되어 극장에 들어갔다. 공연장 내부가 아담해서 어디서든 잘 보일 것 같았다. 예진이 일찍이 예매해 준 덕에 1열에 나란히 앉았는데 무대가 정말 가까웠다. 무대와 좌석 사이 아래 공간에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연주자들과 눈을 맞출 정도로 가까워서 음악도 잘 들릴 것 같았다.
지휘자의 신호의 따라 연주가 시작되고 천막이 열렸다. 무용수들의 공연이 시작됐다. 음악에 따라 분위기가 고조되다가 잦아들며 감정선을 따라갔다.
엄청난 밸런스를 유지한 채 발끝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동작과 턴 동작의 선이 섬세해서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이 블랙 스완이 되어 음악과 함께 격렬한 안무를 선보일 때 더욱 몰입이 되었다. 특히 악마가 등장할 때 심장을 울리는 퍼커션 사운드에 소름이 돋았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니 광장에선 군악대의 웅장한 음악이 들렸다. 광장을 크게 두르고 있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중앙에서 군인들이 전통 경례식을 하며 행진했다. 한참이 지나 도로 쪽으로 말을 탄 군인들이 오와 열을 맞춰 퇴장했다. 몽골에 온 지 5일 만에 본 가장 몽골스러운 광경이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말의 배설물이 군데군데 있어 당황스러웠지만 도심 속 말의 행렬은 보기 힘든 신기한 풍경이었다.
긴 하루에 허기진 우리는 집으로 달려갔다. 예진은 떡볶이를 만들러 먼저 들어가고 나와 세레나는 치킨을 포장해 들어갔다. 치맥에 떡볶이까지 신나게 먹으며 K팝 뮤비와 아메리칸 쇼들을 보았다.
밤늦도록 대화가 이어졌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가다 지금 하고 있는 것과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세레나는 본인의 비전에 따라 국제 이슈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팟캐스트나 뉴스레터를 접하고 있었다. 예진은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목표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몽골에 오기 전 퇴사를 하고 무얼 할지 고민하던 중이라 둘의 이야기를 더 유심히 듣게 됐다.
지금처럼 오래 쉰 적도, 몰두할 대상이 없던 적도 처음이라 시간이 넘쳐나는 게 어색할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즐기려고 온 것인데 잘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시간이 넘치니 과거를 돌아볼 시간도 많았다. 그동안 해온 선택들이 온전히 나의 의지였나 하는 의심이 들었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고민과 불안에서 벗어나려 낯선 곳으로 떠나왔는데, 무거운 생각들은 종종 나를 찾아왔다. 아직 쉽지 않지만 정확한 조준을 위해 영점 조절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해 보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