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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매기 조나단 Apr 27. 2020

야, 너두 서울대 갈 수 있어

찐공부 리얼하게 1편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구구단을 외울 때까지 방에서 못 나오게 방문을 걸어 잠그셨던 적이 있다.

무서워서 그랬는지 금세 외우게 되었던 것 같다. 이후로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면 거의 올 백을 맞았다. 모든 과목 점수가 100점이었다. 매번 시험기간이 되면 어머니가 구구단 외울 때만큼 무섭게 공부를 시키셨던 것은 아니었지만 철저히 준비시키신 것은 맞다. 우선 서점에 가서 전과목 내용이 정리되어 있는 학습전과를 사서 여러 번 공부하고, 시험 보러 가기 전에는 어머니께서 내가 틀렸던 내용을 다시 완벽히 공부했는지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해 주셨다. 내 기억으로는 딱 한번 올 백을 맞지 못한 적이 있었던 것 같지만 초등학교 시절 성적이 좋다는 것은 내 자랑거리였다. 어쨌든.


초등학교 때 그럭저럭 공부를 잘했고,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5학년 때는 전교 부회장이 되기도 했었고, 주변의 기대가 컸다. 특히 어머니는 6남매의 맏딸이셨기 때문에 외가 식구들이 모이면 사촌들 중에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았다. 막연하게 서울대 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런 분위기는 친가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부담스럽다기보다는 그런 기대에 우쭐했던 마음이 더 컸고, 칭찬이라고만 생각했다.


중학교 입학할 때 입학고사를 쳤는데 전교 3등 정도의 성적을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생 때는 잘난 맛에 살고 지신감이 뻗쳐 살았는데, 내가 다닌 동네 초등학교에서는 내가 공부를 제일 잘하는 줄 았았는데!! 중학교는 그렇지 않구나... 나보다 더 잘하는 학생들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약간 기가 눌렸다.


1학년 때부터 반장이 되었고, 보이스카웃에 들어가 학년 대표를 맡기도 했다. 당시 보이스카웃에는 주먹 꽤 쓰는 친구들이 많았고, 흔히 말하는 날라리들도 많았는데 그중에서 대표를 맡고 있었던 나는 항상 뻘쭘할 때가 많았다. 활동성 강한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대표가 된 것은 ‘공부’를 잘해서 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방송반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중학교에 가서도 방송반에 지원해 무리 없이 합격했다. 방송반은 장점이 많다. 우선 아침 조회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지 않고 방송반에서 대충 때울 수 있었다. 학교 안에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우리들 만의 장소가 있다는 것도 당시 기분으로는 아주 멋지고 쿨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기회들을 한껏 누릴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내가 공부를 잘한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또 어쨌든.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러갔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만화를 그렸는데 당시 유행했던 애니메이션은 "에반게리온"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그림 솜씨가 꽤나 좋았는데, 아스카나 신지 같은 주인공 그림도 잘 그렸고, 에반게리온 로봇도 제법 그럴듯하게 따라 그리곤 했다.


고등학교는 너무 멀고 막연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과 친척들의 서울대 가라는 말이 언뜻언뜻 떠오르면서 어린 나이였지만 초등학교 시절과는 다른 왠지 모를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중3이었을 때 외고 입시가 막 유행하기 시작할 때였는데, 별다른 정보도 고민도 없던 나는 외고에 진학해 볼까 하는 고민을 하는 찰나 이미 지원 시기를 놓쳤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속에서 뭔가 접히는 느낌, 꺾이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외고 입시에 지원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지만 그냥 막연히 내가 할 수 없는 일(사실은 도전하지도, 해보고 싶지도 않았던)이 세상에 하나 더 늘어났다고 느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나 대학 입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아무 정보가 없었다. 막연히 고등학교에 가면 성적이 더 떨어질 거고 뭔가 많이 뒤처질 거라는 불안함을 갖고 있었다.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계신 부모님에게 그런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고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도 없다. 다만 막연히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야 하는 학교였다. 고등학교 반배치고사도 있었는데 나는 일부러 더 준비하지 않고 시험을 봤다. 애매하게 잘하는 아이라는 이미지가 부담스러워서 아예 포기한 척하고 있는 전략을 택하기로 했다. 총 15반까지 있었고 한 반에 40명씩이었는데, 반에서 3등을 했다. 깜짝 놀랐다. 내가 고등학교에서도 이 정도나 된다고? 솔직히 놀랐다. 한편 만족스러웠다. 적당히 놀면서 적당히 공부도 잘하는 학생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월이 되어 동아리에 들어가기 위해 방송부 면접을 보았다. 10명의 신입생을 선발하는데 나는 PD로 지원했다. 3차까지 시험을 봐야 했는데 중간에 장기자랑을 하라고 해서 중학교 시절 춤 잘 추는 친구 옆에서 부러워하며 한가락 배웠던 가수의 안무를 선배들 앞에서 춰 보이기도 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오글거리기도 하고, 뭐 그렇게까지...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때는 열심이었다.


다행히 방송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어딘가 멋진 곳에 소속되었다는 뿌듯한 마음에 들떠있었다. 록음악도 좋아하고 나름 팝 음악 잡지도 구독해 보던 시절이라 나중에 크면 카피라이터가 되겠다는 꿈도 정했고, 방송부 활동을 줄곧 해왔으니 뭔가 비슷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연히 예감이 되던 것이 의외로 술술 풀려가는 기분이 들어서 고등학교 생활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 데미안 -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아주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바로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모의고사'라는 시험을 보게 된 것이다. 수능 세대였던 나는 1학년 때부터 수능 문제 유형의 모의고사를 학기에 2번 정도 풀어내야 했는데, 당시 방송반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아무 준비 없이 시험을 쳤고, 당연히 내 수준 정도의 점수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의외로 성적이 높게 나와서 전교 10등을 했다. 반 배치고사 기준으로는 전교 40~50등 정도였기 때문에 나도 놀라고 선생님도 놀랐다. 담임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그리고 내가 우리 반 1등이었던 키 큰 친구보다 모의고사 성적이 더 잘 나왔다고 하셨다. 입학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제야 담임 선생님이 나를 진지하게 대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어리숙한 나이, 키만 컸지 속은 순 어리기만 한 나에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야, 너 이 성적 유지하면 서울대 갈 수 있겠다. 우리 학교는 원래 전통적으로 전교 10등까지, 매년 10명 정도 서울대에 합격한다. 그러니까 너도 서울대 갈 수 있는 거야."


그때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기쁨이라기보다는 비현실적인 말이어서 놀라움이 컸다.


서울대라서가 아니었다. 그저 내 가족들이나 친척이 아니라 전혀 날 모르는 타인에게 내가 무엇인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뭔가 해낼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방송반에 뽑힌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공부로 내가 뭔가를 이룰 수 있고, 심지어 텔레비전 뉴스에서만 들리던, 외고를 가던 친구들도 선망해 마지않던(그러나 다 갈 수도 없는), 우리 부모님과 친척들이 막연하게 넌 서울대 갈 수 있을 거라고 근거 없는 격려를 늘 해주었던 그 서울대를?


그 날 이후 난 너무너무 간절해졌다. 어떻게든 목표를 이루고 싶었다. 서울대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런 목표를 나 스스로 꿈꿔본 적은 없었지만 선생님의 한 마디가 그동안 잠들어 있던 내 안의 스위치를 켜버린 것이다. 뭔가 도전할 수 있는 목표가 생겼다는 사실이 내 생활에 생기를 불어넣기 시작했고, 점점 더 그 목표에 대한 간절함이 커지기 시작했다.


우선 방송반을 탈퇴하기로 했다. 찾아가 부장형에게 말씀드렸다. 형은 생각보다 쿨하게 내 이야기를 듣고 이해해주셨다. 하지만 방송반 룰도 있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말 한마디로 탈퇴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 요즘 같은 상황이라면 다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부장형에게 대걸래 자루로 풀 스윙 10대를 맞고 방송반을 탈퇴할 수 있었다. 나쁜 감정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나 때문에 신규 회원을 제대로 뽑지 못한 방송반 동기, 선배 형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엉덩이가 아픈 것보다 기대감과 설렘에 들뜬 마음이 더 컸다. 이제 맘 놓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17살 소년에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부나 입시의 문제 아니었다. 차라리 존재가치를 입증받을 기회이자 삶의 방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다운 기회가 처음 찾아온 것이었다.


난 그렇게 공부를 시작했다. 아주 치열하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학이라는 높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갖은 노력끝에 결국 극복해낼 수 있었다. 힘든 과정이었단 만큼 큰 성취감이 뒤따라왔다.


어려운 숙제는 그것을 풀어내고자 작정한 이 앞에서는 장애가 아니라 디딤돌이 되는 것 같다. 수학 공부의 벽을 뛰어남는 과정에서 내면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번에는 내 바깥이 아닌 내 안에서의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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