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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개 Apr 17. 2020

시작 (1)
27에 프랑스로 제과 유학 가기

24살. 훈련소 옥상에서 별 하늘을 보며 그 나이 또래 남자애들이 그렇듯 나 또한 내 미래를 그려보고 있었다. 그때 내 미래는 훈련소 조교들이 흔히 말하듯이 밤하늘만큼이나 어두웠는데, 내가 사회에 남겨두고 온 흔적이란 1점대의 학점, 방종과 나태로 점철된 휴학생의 삶뿐이었다. 나는 의무소방원을 지원했는데 내 동기들의 엄청난 학벌과 그들의 빛나는 목표를 보고 있자면, 대학교로 돌아가 졸업해 회사원이 되는 루트는 성공하지 못할 삶에 뛰어드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물론 그건 당연히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시간 여행을 해서라도 뒤통수를 한대 세게 날려주고 싶은 정도의. 


실없는 망상들 사이로 떠오른 건 <광복절 특사>의 한 장면이었다. 설경구와 차승원이 함께 감옥에서 탈옥하는 내용의 영화였는데 내 머릿속에 각인된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극 중에서 설경구는 장발장처럼 도넛을 훔쳐서 먹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여차저차 해서 특사로 출소된 이후 그는 빵집을 차린다. 그리고 그 빵집에서 자신이 만든 소시지 빵을 정말 행복하단 표정으로 한입 무는데 어린 나는 그 장면이 정말로 좋아서 곧장 부모님에게 달려가 조리 고등학교를 가고 싶다 말했다. 자식이 '큰 인물'이 될 거라 믿으셨던, 혹은 지금도 믿으시는 우리 어머니는 내 등짝에 불을 지르셨다. 


조리고 가고 싶어요! 응? 다시 말해봐.


운명의 장난일까, 내 머릿속 한켠에 숨어 있던 차승원의 행복한 표정은 다시금 눈 앞에 떠올랐고 그 훈련소 옥상에서 나는 파티시에가 되기로 결정했다. 당시 요리사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는 시기이기도 했거니와 항상 기술에 대한 로망이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기왕 하는 거 조금 폼나게, 멋지게 해 보자 생각했고 프랑스에서 시작하기로 맘을 먹었다. 물론 뒤통수를 한번 더 맞아야 할 생각이었다. 


2년간 인고의 시간을 버티며 정보를 모으고 때로는 현직자에게 이메일로 조언을 구해가며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설득이라기보다는 반 통보였고 잠시간은 집 밖에 나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렇게 나는 2017년 겨울, 프랑스로 떠났다. 유로는 아직도 비쌌고, 처음 잔 파리의 호텔은 코딱지만 했고 더러웠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에 기분만은 좋았다. 처음으로 간 프랑스 빵집에서 유창한 한국어로 나에게 갈레트를 추천해주던 프랑스인 종업원은 내게 이 유학 생활이 잘 풀리리라 하늘에서 내려준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게 했다. 


본격적으로 간지 나는 스타 셰프의 삶을 시작하기 전에 물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프랑스어. 그때까지 나는 프랑스어 일자무식이었다. 신중성 어학원을 1달 다니다가 한국식 교수법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얼탱이 없는 이유로 때려치우고 가면 되겠지 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머리에 새겼다. 어학원은 비시Vichy라는 조그만 프랑스 소도시의 마을로 결정했다. 비시 화장품의 그 비시 맞다. 어학원의 이름은 CAVILLAM이라는 이름의 어학원이었는데 아마 프랑스 유학생들에게 나름 유명하다면 유명한 곳이었다. 커리큘럼은 좋았지만 그 대신 학원비가 굉장히 비쌌다. 


대충 이런 분위기


어학원 생활은 나름 만족스러웠다. 첫 몇 주일 동안에는 내가 외국인들과 외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란 생각에 뭔가 대단함을 느꼈지만, 그 뒤로부터는 늘지 않는 프랑스어에 괴로워한 밤들이 이어졌다. 그러한 밤들은 soirée란 이름의 프랑스식 술 모임으로 이어졌고 결국 부어라 마셔라로 끝이 났다. 학교 커리큘럼은 소문대로 좋아서 그래도 프랑스어가 늘긴 했다. 인풋만큼 아웃풋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학원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는데 제과점에서 일을 하다 온 사람들도 꽤 있었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친해지긴 어려웠다. 내 타고난 아싸 기질도 한몫했을 터지만 뭔가 나름의 벽 같은 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제과를 해온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랄까, 진골과 6두품 같은 느낌? 착각만은 아니었던 게 이러한 벽은 나중에 프랑스 제과점에서 일하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뭐 그들 입장에서는 아니꼬울 수도 있었겠다. 이 필드에 뛰어들고 싶다고? 10년은 이르다 이 말이야. 


그렇게 학원을 다니던 중 늦은 여름에 우연히 제과를 하려고 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 역시 늦은 나이로 프랑스에 왔는데 처지가 비슷해서였는지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는 그녀가 말했다. 너는 어디 학교를 갈 거야? 몇 군데 생각해 놓은 학교가 있었지만 나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녀가 말했다. Ferrandi는 관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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