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혼자 살아가는 중입니다
내 몸엔 가시가 있다. 평소엔 그냥 털이었다가 누가 내 사적 영역을 건드리면 가시로 변한다. 내 주변에는 내가 선 넘지 말라고, 거긴 내 사적 영역이라고 아무리 경고를 해도 꼬치꼬치 캐묻는 인간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학창 시절 가정환경조사서를 써낼 때처럼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된다. 내 아버지가 야간고 중퇴에 무직이라는 사실을 알아 뭐하게? 취직시켜줄 것도 아니지 않나?
P씨도 그런 인간 중 하나다. 그이는 자기 얘기하는 걸 엄청 좋아한다. 듣다 보면 뭐 저런 것까지 말하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결국 지 자랑이다. “우리 남편 회사에서 짤렸는데 스마트 스토어 창업해서 대박 났잖아. 내가 그거 배우라고 했거든.” “우리 집에 세 살던 사람 내 덕분에 아파트 34평 입주권 받았잖아. 맨 날 월세도 제때 못 내고 쩔쩔 매길래 내가 차라리 대출받아서 빌라 반지하방이라도 사라고 했거든. 근데 거기가 재개발 예정 지역이 됐지 뭐야."
그렇게 실컷 자기 자랑을 하고 나서는 내 근황을 묻는다. 의도가 불순한 질문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
'알면서 뭘 물어? 내 입으로 내가 후졌다고 말하는 걸 듣고 싶은 거야?'
그렇게 쏘아붙이려다 자격지심이라고 할까 봐 요즘 ○○자격증 공부 중이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더 이상은 말하기 싫으니 묻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런데 P씨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격증 따지 말고 △△자격증 따라고 했다. 요즘 같은 고령화 시대엔 △△자격증이 유망하다나. 더 나아가 자기가 그쪽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 취직 자리도 알아봐 줄 수 있다고 했다. 순간 내 몸의 가시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내 나름대로 알아보고 고민해서 ○○자격증으로 결정한 건데 자기가 뭔데 △△자격증을 따라는 건지, 난 자기만큼 생각도 못하는 돌대가린 줄 아는 모양이다. 만약 내가 내 의지에 의해 △△자격증을 따더라도 P씨는 그게 자기 덕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 인간을 갱생시켰다는 자기 오만에 빠져 우쭐해하는 꼴이라니, 생각만 해도 역겹다.
“그렇게 좋으면 너나 따!”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P씨의 언성도 높아졌다. 기껏 생각해서 말했더니 왜 화를 내냐며 불쾌해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뭘 잘못했냐며 억울해했다. 그래, 굳이 따지자면 남 일에 나서는 게 잘못은 아니지. 문제는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남의 인생에 참견하고 간섭하는 너의 그 성격이 싫은 거지.
더 이상 P씨와 마주 있기 싫었다. 같이 있어봤자 화해는커녕 감정 소모만 할 것 같았다. 나이 들어 뭔 짓인가 싶다가도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한번 싫어지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변하거나 그이가 변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헤어지면 계속 찝찝할 것 같아 마음을 다잡고 마무리를 잘 지어보려는데 P씨가 직격탄을 날렸다.
“넌 행복한 거야. 한 번도 바닥을 겪어본 적이 없잖아!”
하아!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말 앞에 “난 불행한데,”가 빠진 말투였다. 분노가 치솟았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른데 내가 아직 바닥을 경험하지 않아 행복한 거라니? 지금 난 늪에 빠져 있는데? 늪에 빠진 사람이 늪의 바닥을 보려면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 P씨는 내 죽음을 봐야만 나의 불행을 인정하게 될까?
공감이 안되면 이해라도 하던가, 이해도 못하겠음 입이라도 닥치든가! 설사 내가 행복하대도 나보다 가진 것 많은 네가, 남편도 있고 집도 있고 심지어 직업까지 있는 네가 나의 행, 불행을 판단하는 건 아니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재수 없어!'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날이 P씨를 본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