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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양 May 25. 2023

Breadwinner, 가장

진정한 breadwinner 알런 할아버지

언제부터인가 낯선 번호로 전화가 오면 잘 받지 않게 되었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초록색 수화기 아이콘을 눌렀다가는, 휴대폰 바꿀 때가 되지 않았는지 걱정해 주는 통신사나 예전에 궁금해서 한번 들어본 무료 수업 제공자가 끈질기게 번호를 바꿔가며 연락을 해 오면 '역시나' 모르는 번호는 안 받는 게 맞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요즈음은 시대가 좋아서 휴대전화가 아닌 일반전화는 발신 지역이 함께 뜬다. 그러면 발신지가 스코틀랜드라거나 우리 집에서 최소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잉글랜드 북부에서 오는 전화는 백이면 백 거의 피하고픈 광고 전화다.


며칠 전 늦은 오후 일반전화로 전화가 왔는데 화면에 찍힌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발신 지역이 내가 사는 동네였다. 이럴 경우엔 아이들 학교나 병원에서 오는 전화일 수 있으므로 받는다. 아주 가끔이지만 일반전화로 김치를 주문하는 고객도 있다. 전화를 받으니 나이가 지긋하게 들리는 남자분이 내 이름이 '수민'이 맞는지 물으신다. 맞다고 하니 성당 주보 차량 봉사란에 내 번호가 있어서 전화를 하셨다고 했다. 내 전화번호를 차량 봉사에 올린 건 아마 최소 2-3년은 되었을 텐데 전화가 온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아주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 데시벨이 올라갔다.


"네 맞아요. 차량 봉사 합니다, 제가. 어디에 가셔야 하나요?"

"급한 것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일로 레더헤드에 가야 하는데 차량 봉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요?"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다섯 시. 오늘 움직이기에는 조금 늦은 듯하여 혹시 내일은 괜찮으신지 여쭈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속사포로 레더헤드 어디를 가셔야 하는지, 집 주소는 어떻게 되는지, 정오 즈음에 괜찮으신지 질문을 쏟아 내었고 할아버지는 사실 본인이 귀가 잘 안 들린다며 부인을 바꿔주겠다고 하셨다. 순간 아차, 싶어서 할머니가 받으신 후에는 천천히 또박또박 필요한 정보를 여쭙고 다음날 정오에 모시러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오전에 북클럽 모임을 하고,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온 다음에 뉴몰든에 고춧가루를 사러 가야 하는 일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북클럽과 할아버지 사이에 재빨리 샤워를 하고, 어디에 앉아서 가실지 몰라 해피 발자국으로 지저분해진 차의 뒷좌석을 물티슈로 열심히 닦았다. 사실 이 기회를 핑계 삼아 실내 세차를 하고 올까 싶기도 했지만 잘못하다간 늦을 것 같아 물티슈가 낫다 싶었다.


물티슈로 열심히 닦다가 시간을 보니 어느새 5분 전이다. '아, 난 이래서 안돼...' 오늘만큼은 절대 안 늦으려고 했는데 너무 많은 것을 끼워 넣은 결과 또 늦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물티슈 청소를 조금 일찍 시작했거나, 어제 미리 해놓기만 했어도 안 늦었을 텐데... 하지만 나는 안다. 물티슈 청소를 어제 해 놓았다 한들 나는 분명 이 틈새 시간에 또 다른 무언가를 끼워 넣어하다가 늦었을 거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를 하고 지도를 한번 더 확인한 후에 출발했다. 할아버지댁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할머니가 어제 설명을 참 잘해 주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의 주차공간에 은색 소형차가 주차되어 있어 잠시 어리둥절했다. 차를 돌려 운전자 옆 좌석이 할아버지 댁 문 앞에 오도록 차를 멈추자 대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아, 성당에서 뵌 적이 있는 할아버지셨다. 할아버지는 쇼핑가방을 한 손에 들고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셨다. 할아버지 뒤로 꽃무늬 카디건을 곱게 입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문간에 서서 역시 미소를 띤 얼굴로 손을 흔드셨다. 할아버지께 앞자리 문을 열며 어느 좌석이 편하시겠냐고 하자 앞이 괜찮다고 타셨다. 뒷좌석에 해피 발자국이 아직 다 안 지워졌던 터라 내심 안심이 되었다.


슬로모션처럼 할아버지는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최적의 위치를 찾아 단단히 부여잡고는 천천히 엉덩이를 먼저 의자 위에 밀어 넣고 힘주어 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차 안으로 들여 넣으셨다. 그리곤 활짝 열어놓은 문을 닫으려고 팔을 뻗으셨다. "괜찮아요, 제가 닫을게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운전석 쪽으로 가는데 할머니가 "블루배지 가져가는지 좀 물어봐요." 하셨다. 할아버지가 잘 챙기셨다고 할머니께 전해드리자 안심하는 미소를 보여주셨다.


블루배지는 장애인으로 등록되면 받는 파란색 수첩인데 나는 혜경언니 덕분에 블루배지를 잘 알고 있었다. 블루배지 수첩을 열어 주차시간을 다이얼로 맞춰놓고 창 아래에 잘 보이게 두면 장애인 전용 주차공간에 무료로 주차를 할 수 있는 아주 파워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자 할아버지가 블루배지는 참 좋은 것이라며 이것 덕분에 돈을 많이 절약했다고 하셨다. '맞아요, 블루배지는 참 파워풀하죠. 저도 하나 갖고 싶어요.' 하고 농담을 했지만 아마 못 들으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살 게 많지는 않지만 몇 군데 들러야 하고, 세인즈버리에서 장을 봐야 하니 스완센터에 주차를 하면 좋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스완센터를 향해 출발했다.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며 가는 동안 할아버지는 집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셨다. 얼마 전까지는 손수 운전을 하셨는데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운전 금지 명령을 받아서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셨다. 어쩐지 길눈도 밝고 운전자의 입장에서 설명을 잘하시던 게 이해가 되었다. 스완센터로 가는 내 할아버지는 손으로 왼쪽 오른쪽을 가리키셨고 아는 길이지만 나는 엄지를 들어 감사를 표했다. 몇 마디 나누다 보니 내 입술을 보지 않고는 내 말을 잘 못 들으시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안내하는 대로 2층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를 하고, 블루배지를 열어 주차시간을 표시하고 당당하게 차에서 멀어졌다. 2,3파운드 밖에 안되어도 주차비는 늘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는데 블루배지 덕분에 뭔가 굉장한 득템을 한 기분이랄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할아버지가 쇼핑하는 동안에 같이 갈 건지, 다 끝나고 만날지 물어보셨다. 최대한 원하는 대로 해드리고자 편하신 대로 하겠다고 하자 '그럼 옆에 붙어 있어.' 하고는 웃으셨다.


할아버지와 쇼핑센터 일층을 걷는데 할아버지는 지팡이는 없이 잘 걸으셨지만 고령이 되면 똑바로 걷는 게 힘들어지는지 평행으로 걷지 못하고 자꾸 내 쪽으로 오셔서 피하다가 가게 안으로 들어갈 판이었다. 그렇다고 오늘 처음 만난 할아버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Man on mission'. 임무를 수행하듯 할아버지는 쇼핑 리스트를 확인하고 첫 번째 목적지 파운드랜드에서 AA 배터리를 집으셨다. 파운드랜드는 한국으로 치면 ‘천냥마트’나 요즘엔 다이소 비슷한 상점이다. 10개에 1파운드짜리 저렴한 브랜드의 배터리 두 팩을 집어서 바구니에 넣으시다가 바로 아래에 22개에 2 파운드 하는 큰 포장을 발견하시곤 바구니에 담은 작은 포장 두 개를 도로 꺼내셨다. "같은 값에 두 개를 더 얻었네요. 최고!" 알뜰살뜰한 할아버지의 쇼핑스타일이 진심 맘에 들어 다시 한번 엄지 척을 날렸다.


다음은 문구류라고 앞장서셨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바로 아시는 걸로 보아 파운드랜드에 자주 오시는 것 같다. 나의 원래 오지랖이라면 쇼핑리스트를 달라고 해서 '잠시 서 계세요'하고 바람같이 리스트의 물건들을 가져왔을 거다. 하지만 물건을 사 오라는 심부름이 아니라 가는 길을 손수 안내해 가면서 쇼핑센터에 직접 나오신 데에는 물건 사는 것 말고도 이유가 있을 것 같아 혼자 찾아보시도록 옆에서 기다렸다. 그러다 '내가 편지봉투를 찾는데'하고 말씀하시면 봉투 있는 곳을 알려드렸다.


파운드랜드에서 배터리와 편지봉투를 사고 부츠에서 아기용 손잡이 컵을 사고 마지막으로 세인스버리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면 되었다. 슈퍼마켓에서 할아버지가 꽃다발을 사다가 할머니에게 안기는 로맨틱한 모습을 혼자 상상하며 결혼하신 지 얼마나 되셨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지난주에 결혼 70주년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우리 성당에서 본인이 가장 고령이라고, 1960년 즈음부터 다녔다고 하셨다. "아이코,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릎을 굽혀 courtesy, 왕족에게 하듯 인사를 하고 슈퍼마켓에 들어섰다.


할아버지는 익숙하게 주머니에서 1파운드 동전을 꺼내 쇼핑카트를 가져오셨다. 온 김에 나도 필요한 것 몇 가지 사자 싶어서 할아버지 위치를 확인하며 내 필요한 것을 집어가며 동분서주하였다. 할아버지는 쇼핑 리스트에 있는 것만을 찾아다니며 카트에 담으셨다. 남자라서 그런지 원래 쇼핑 스타일이 그러신 지 나로서는 참 있을 수 없는 일인지라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빵코너에서 식빵을 집어드시는데 유통기한이 임박해 노란 스티커가 붙은 것을 집으셨다. 나는 무엇을 사든 유통기한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있는지라 이 빵이 내일까지인데 괜찮겠냐고 두 번을 물어보았다. 두 번을 괜찮다고 하시는 모습이 워낙에 익숙하게 노란 스티커를 애용하시는 듯싶어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계산원이 있는 곳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서 나는 셀프계산대로 향했고 할아버지가 폐건전지를 수거함에 버리러 가시는 동안 몇 가지 되지 않는 내 물품들을 먼저 계산했다. 이어 할아버지의 쇼핑을 스캔하는데 아까 집어온 식빵봉지에 붙은 노란 스티커에 바코드 부분이 없었다. 보통은 노란색 할인 스티커에 바코드가 함께 붙어 있어서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건데 바코드가 없으면 할인을 받을 수가 없을 터였다. 할아버지에게 스티커를 보여드리며 바코드 부분이 잘려있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카트 위에 놓인 쇼핑가방을 열어 그냥 넣으라고 하셨다. 처음엔 못 알아듣고 '아니, 여기 원래 바코드가 있어야 되는데 뜯어져서 없어요.' 하자, 재차 그냥 여기에 넣으라고 가방을 벌리셨다. 그제야 어차피 스캔이 안되니 그냥 넣으라는 말뜻을 알아차리고 빵을 쇼핑가방에 넣었다. 스캔을 마친 상품들도 가방에 마저 담고, 멤버십 카드까지 알뜰하게 챙겨서 계산을 하시는 모습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90이 다 되었거나 넘었을지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한정된 연금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일 수 있겠구나. 그래봐야 1파운드도 안 되는 식빵 한 봉지를 슬쩍했다 한들 셀프 계산대 카메라에는 내 얼굴만 잡혔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가 싶다가 한편으로는 귀엽고 한편으로는 짠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쇼핑을 마무리하고 댁으로 모셔다 드리자 할아버지는 "You did me beuautifully today." 하시며 내 볼에 볼뽀뽀를 하셨다. 쇼핑한 것을 넣어드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으나 충분히 독립적으로 잘하실 것 같아 그냥 돌아섰다.


만약 내가 할아버지 의중을 알아채지 못하고 점원을 불렀다거나, 융통성이 없어서 천 원짜리라도 절도는 절도라고 정색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그랬다면 오늘 나의 봉사는, 우리의 쇼핑 데이트는 ‘뷰티풀'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70년째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계신 할아버진 알런. 그는 오늘 진정한 의미의 breadwinne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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