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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양 Feb 02. 2024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영국 중고등학교 시험감독관 체험기 1

‘exam invigilator? 그게 뭔데요?‘

이런 포지션이 있다는 이야기를 몇 년 전에 둘째 아이 학교 학부형으로부터 들었다. 중고등학교의 시험기간에만 파트타임으로 시험감독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긴 경력단절을 가진 그 엄마는 이 시험감독관으로 ’ 일자리 전선‘에 복귀했다고 했다. 그 뒤로 그녀가 다른 곳으로 척척 이직을 잘 해내는 걸로 보아 감독관 자리가 사회로 돌아가는 진입로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아니, 실은 시도 때도 없이 이메일 인박스와 정크메일박스에 취업공고 사이트들에서 메일이 날아든 지 육 개월이 넘었다. 작년 9월에 둘째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스쿨런을 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도 많이 생기게 되니 나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작년 초에는 9월이면 짠! 하고 직장을 잡고 일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재취업의 문 보다 더, 훨씬 더 높은 내 심리적 장벽을 넘는 것이 관건이었다.


자신감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도무지 일 년에 28일의 휴가를 가지고 살 수 있을지 덜컥 겁부터 났다. 강산이 거의 두 번 바뀔 시간을 지속해 온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뜨악하는 공포로까지 느껴질 줄은 미처 몰랐다. 한동안 무기력감과 우울감을 느끼다가 정신을 차렸다. 나에게 시간을 주자. 갑작스러운 변화 말고 조금 천천히 가자. 그래서 떠올린 것이 시험감독관이었다. 예전 그 엄마도 시험감독관으로 시작했다잖아. 


마침 그녀가 다녔던 바로 그 학교에서 감독관 모집 공고가 났다. 페이는 최저시급이나 다름없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자신감 되찾기다. 나의 쓸모를 되찾는 것이 급선무다. 이력서를 보내고 얼마 후 면접이 잡혔다. 얼마 만에 하는 면접인지... 다행히 순조롭게 지나고 바로 다음날 전화가 왔다. 면접관이 아주 마음에 들어 해서 최대한 빨리 채용을 원한다고. 다행이다. 나 아직 쓸모가 있구나.


면접관이 빨리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영국의 행정업무는 언제나처럼 달팽이의 속도이고 학교에서 근무하는 특성상 필요한 백그라운드 체크를 하는데만 한 달이 걸렸다. 그 사이에 시험감독관 매뉴얼을 미리 받아서 숙지하도록 안내를 받았다. 우편으로 도착한 두툼한 매뉴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시험감독관이 알아야 하는 게 이렇게나 많다고? 시험지 나눠주고 커닝하는지 지켜보고 시험지 걷어오면 되는 거 아니었나?


잊었구나. 영국은 매뉴얼의 나라. 아주 세세한 내용까지 다 커버하는 매뉴얼이 시험감독관에게도 해당되었다. 게다가 한국의 집단 우선 주의와 반대되는 영국은 개개인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매뉴얼이 상당했다. 일례로 한국은 일 년에 단 하루 수능날 전국의 수험생들이 한꺼번에 시험을 치르고 운이 나쁘게 그날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해도 다음 해를 기약해야 한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리스케줄'이 가능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시험을 못 보게 되면 스케줄을 조정해서 다시 볼 수 있다. 훨씬 더 인간적이긴 한데 이러한 문화 때문에 시험감독관 매뉴얼이 복잡해진 것도 사실이다.


학생들 가운데 신체적 장애가 있거나, ADHD, 난독증, 난청, 불안장애 등등의 특수한 상황인 경우에는 시험 시간을 더 길게 주거나 작은 방에서 감독관과 1대 1로 시험을 볼 수도 있다. 어떤 이유인지 글씨를 쓰는 것이 어려운 경우 크롬북을 이용해서 답안을 작성하기도 한다. 난독증이 있는 학생은 문제를 읽어주는 감독관과 함께 작은 방에서 시험을 본다. 내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모습들이 감독관 매뉴얼에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출근 첫날. 아침 8시에 도착해서 시험은 9시부터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과목은 비즈니스 스터디. 12학년 고등학생들이다. 고사장에 빼곡하게 책걸상이 열을 맞춰 놓여있고 각자 다른 고사장에서 근무하는 감독관들이 홀에 모여 문제지를 세어 가지고 갔다. 문제지 외에도 문구류가 한가득 들어있는 트레이, 각 휴지 두 개, 좌석 안내도등이 필요하다. 문구류는 왜 저렇게 많은지 궁금했으나 며칠 근무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알게 된 것이 있었으니... 아이들이 시험을 치는 그 두 시간 동안 나는 말없이 조용히 서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 


근무 첫날이라고 하자 동료 감독관들이 매우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같은 홀에서 근무한 리사라는 분이 좀 지겨울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 시간에 쇼핑할 거리를 생각하거나 저녁 메뉴를 고민한다고 했다. 두 시간 시험 시간에다 추가 시간을 받는 아이들은 30분을 더 갖게 되니 2시간 반. 두 시간 반동안 저녁메뉴를 고민할 수는 없고, 나는 이 시간에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걸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곧 이 시간에 '생각'을 하며 보내기로 했다. 글감을 떠올리고 관찰을 하고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하다 하다 지겨워져서 학생들 중에 왼손잡이가 몇 명인지, 물병을 가진 아이들은 몇 명인지 여학생은 몇 명인지 속으로 헤아리기도 했다. 


시험시간이 한 시간이 넘어가자 여기저기서 손이 번쩍번쩍 들린다. Toilet break. 화장실을 가겠다는 아이들은 감독관 한 명이 동행을 해서 바지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게 한 뒤 화장실 사용을 허락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문제는 아이들이 이 짧은 '외출'을 남용한다는 사실. 두 시간의 시험 시간이 누군가에겐 너무나 길고 지루해서 앉아서 멍하니 있느니 화장실을 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 진짜 가고 싶은 거 맞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데리고 간다. 줄의 학생 명이 연이어서 화장실을 가기도 했다. 리더 감독관 제닌이 '음,, 수상한데.' 하며 메모를 남겼다. 


책상 사이의 간격은 1.25미터라고 매뉴얼에 나와있었는데 아이들이 보는 시험은 기본적으로 커닝이 불가능해 보였다. 90프로 이상이 서술형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학교 다닐 때 사진선다형의 답안을 공유하던, 그런데 밀려 적어서 다 틀리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숫자를 쪽지에 적어서 던지고, 지우개에 적어서 던지는 그런 류의 커닝은 영국식 시험에서 통하지 않는다. 


화장실 갈 때 말고도 아이들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자리에서 조용히 손을 든다. 그러면 발견한 감독관이 다가가 조용히 묻는다. 계산기가 필요한 아이, 펜이 필요한 아이, 콧물 닦을 휴지가 필요한 아이. 리사의 말로 어떤 감독관들은 부정행위를 찾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기도 한다는데 적어도 그날 그 홀에 있었던 감독관 넷은 아마도 짠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싶다. 머리 쥐어뜯으며 한숨 쉬는 것도 안쓰럽고, 글씨 쓰느라 뻐근해진 손을 공중에 터는 아이들도 안쓰럽고, 도무지 너는 여기 왜 있니 싶은, 시험에 관심이 1도 없는데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던 수염 덥수룩하던 맨 앞줄에 앉은 너도 참 안쓰러웠다. 


같은 장소에서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른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적을 것이 많은 아이들은 끝나는 순간까지 펜을 잡고 있지만 벌써부터 끝낸 아이들에겐 남은 시간이 일생처럼 느껴질 것이었다. 종료시간이 다가오면 우리들은 한 마음이 된다. 앉아있느라 온몸이 근질근질한 아이들도, 서 있느라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감독관들도 한 마음으로 디지털시계를 연신 바라보며 카운트다운을 한다. 5분, 3분, 2분, 1분.


시험지를 걷을 때도 최대한 빨리 걷는다. 나를 위해서 보다는 사실 너희들 빨리 보내주고 싶어서. 첫 근무날에 그 넓은 홀에 끝없이 쏟아져 들어오던 장성한 아이들을 보며 처음엔 위축이 되기도 했다.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 안경을 쓰고 근엄한 얼굴로 맞았다. 그런데 시험이 시작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엄마 모드로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들면 뭐가 필요한지 얼른 들어주고 싶고, 방해가 되지 않게 최대한 조용히 곁을 지나갔다. 열일곱여덟이면 남자아이들은 아저씨처럼 수염이 길 수도 있구나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어른과 아이 그 중간 어딘가에서 크느라 고생하고 버티느라 애쓰고 있을 녀석들이 조카 같고, 자식 같아 짠했다. 


그렇게 나는 오래간만의 출근 첫날에 '나는 영원히 엄마가 되었구나' 새삼 느꼈다. 


(표지 이미지: Playground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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