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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양 Feb 07. 2024

라이트 라이트

가볍게 글쓰기- 산책

브런치 작가 타이틀을 얻고 한참을 글을 쓰지 못했다. ‘작가’라는 호칭이 내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할뿐더러 뭔가 내게 과분하다는 느낌도 들었던 것 같다. 잘 쓰고 싶은 열망이 강해질수록 자신감은 쪼그라들고 고작 내놓는다는 것이 힘들었던 인생 이야기뿐이라 스스로가 질리고 말았다.


나도 일상에 숨어 있는 즐거움을, 엄청 특별하지 않아도 고개가 끄덕여지고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을 구슬 엮듯이 잘 꿰어서 예쁜 조개 목걸이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라라크루 7기 모집 공고를 보고 마음이 동했다. 라이트 라이트. light write. 빛나는 일상을 가볍게 써보기. 바로 이거다.


탁월함으로 가는 길은 꾸준하게 ‘많이’ 연습하는 것이라 했다. 매주 두 편의 글을 꾸준하게 발행하다 보면 손톱만큼이라도 앞으로 전진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용기를 내본다.




마음이 우울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내리는 처방이 아마 산책일 것이다. 그건 매우 효과적이고 돈도 들지 않고 육신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물론 정말 너무너무 우울할 때에는 산책이 웬 말인가.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걷는 행위, 특히 야외를 걷는 산책의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생각이 정리가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마치 무릎관절에 있는 톱니바퀴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돌아서 뇌에 있는 톱니바퀴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 같다. 마법 같은 이 작용 뒤에는 분명히 과학적 근거가 있을 거라고 누구에게든 장담을 한다.


한동안은 걸으면서 오디오 북을 들었다. 산책도 하고 독서도 하니 시간 절약도 되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 같아서. 그러다 어느 날 충전 하는 것을 잊어버려 걷는 도중에 무선 이어폰의 배터리가 바닥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이어폰을 빼 주머니에 찔러 넣고 걸었다.


새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청량하고 고운 새소리가 커다란 나무 어딘가에서 퍼져 나왔다. 어디 있지? 이 고운 소리의 주인은?


고개를 쳐들고 한참을 찾았다. 로빈이다. 등은 갈색에 배는 하얗고 가슴은 주홍빛 붉은색을 띠는 로빈은 영국에서 참새만큼 흔하게 보이는 새다. 흔하지만 천덕꾸러기는 아니어서 로빈을 만나는 것을 좋은 징조로 여기기도 한다. 특유의 빨간색 배 때문에 크리스마스 카드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하는 로빈이 이렇게 예쁜 소리를 내는 새였구나. 내가 효율적으로 걷기와 독서를 병행하는 동안 이렇게 예쁜 로빈의 노래를 놓쳤었구나.


이어폰을 빼는 순간 나의 걷기는 산책이 되었다. 산책과 함께 내 머릿속에는 공간이 생겨났다. 걸으면서도 끝없이 인풋을 해야 할 것만 같았던 초조함과 불안함을 걷어내니 고요한 정적과 함께 하얀 백지가 나타났다. 산책을 하면서 보고 들으며 자연으로부터 받는 영감이 때로는 글로, 때로는 그림으로 백지에 채워졌다. 엉켜있던 생각의 실타래가 풀리기도 하고 번쩍하며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다.



산책은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땅을 보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 보고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을 살핀다.(이건 하도 비가 오락가락해서 비를 피하기 위함도 있다) 비행기가 남기고 간 하얀 비행운을 눈으로 좇는다. 안녕! 너는 어디로 가는 비행기니? 나도 데려가~


예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목이 뻐근하도록 한참을 나무를 올려다보기도 하고 코믹한 까마귀나 갈매기 소리에 헛웃음이 나기도 한다. 담장 위를 지나던 회색 다람쥐는 인기척을 느끼곤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안 움직이면 안 보이는 줄 아는가 보다. 수선화의 초록 줄기가 아직 뱅뱅 맴돌고 있는 겨울바람을 뚫고 나와 용감하고 꿋꿋하게 군락을 지어 서 있는 모습도 보인다. 아직 추운데 괜찮겠니?


부산 동구 출신 몰티즈 해피가 발발거리며 걸어가다가 잔디밭에서 뱅글뱅글 돈다. 그리고 이내 자리를 잡고 큰일을 본다. 그러면서 꼭 나를 올려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생각할까? 애미야 치워라~ 하고 생각할까?


시간에 쫓기는 바쁜 날엔 큰 볼일을 꼭 밖에 봐야 하는 해피를 데리고 골목 한 바퀴를 도는 짧은 산책을 나간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다. 최대한 빨리 볼일을 봐주면 땡큐다. 마음이 바쁘다. 빨리해라, 빨리… 내가 안달을 하거나 말거나 킁킁거리며 가로등도 훑고 꽃나무도 언저리도 꼼꼼하게 냄새를 맡는다. 잘 따라오다가도 뭔가 중요한 걸 놓쳤다는 듯 다시 돌아가 냄새를 맡기도 한다. 평소 같으면 귀여워할 녀석의 꼼꼼함이 바쁜 날에는 원망스럽다. 빨리해라, 빨리…


길가에 있는 어느 집 앞을 지나다 그 집 대문 앞에서 뱅그르르 돈다. 아 왜 하필 남의 집 문 앞에… 하지만 일단 반갑다. 얼른해라, 얼른.

응아를 하는 즉시 너무 반가워 한껏 격양된 톤으로 ‘아이구 잘했어! 너무 이뻐!’ 하고 뒤처리를 한다. 틀림없이 해피는 내게 엄청 귀한 선물을 했다고 생각할 것 같다.

다람쥐와 얼음땡 놀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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