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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양 Feb 18. 2024

박희영을 찾습니다

응답하라 1993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시절 나는 고양군 원당읍에 있는 성사 국민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고 5학년에 은평구 불광동의 불광 국민학교로 전학을 했다. 그 시절 우리 동네의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서울에 있는 중, 고등학교로 보내기 위해 서울에 있는 친인척의 주소지로 전입신고를 했다. 내가 살던 원당의 주공아파트는 새로 개발된 아파트 단지라서 달랑 국민학교 하나가 새로 생겼던 것 같다.


오죽하면 단지 쪽으로 뻗은 도로는 아파트 단지에 이르러 끝이 나서 버스들이 크게 유턴을 해서 돌아나가야 했다. 길 뒤로는 논밭이 펼쳐지고 산이 있었다. 막다른 아스팔트 도로의 끝에는 볕이 잘 들어서 동네 주민들이 쌀을 말리고 고추를 말리기에 최적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 불편하게 돌아나가야 하는 길로 버스들이 들어왔는데 이 버스들은 서울로 출근을 하는 어른들과 엄마, 아빠가 서울로 전학을 보내서 등교를 서울로 해야 하는 나와 같은 초중고 학생들의 발이 되어주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75번 일반버스와 757번 좌석버스. 75번 버스를 타면서 회수권을 내거나 동전을 냈는데 빠듯한 용돈으로 차비까지 하느라 별의별 꼼수들이 생겨났다. 회수권을 반으로 찢어 마치 반으로 접힌 것인 양 바삐 올라타는 앞 뒤 사람들과 섞이도록 급하게 집어넣거나 150원 차비를 십 원짜리 오십 원짜리 동전을 섞어 백 원만 내는 식이다. 아마도 기사님들도 다 알면서 봐주셨지 싶다.


5학년에 전학 간 불광 국민학교에서 나처럼 경기도에서 통학을 하는 재미있는 친구를 사귀었는데 애들은 재밌다고 생각하지만 어른들은 경계를 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때말로 ‘날라리’라는 꼬리표를 달던 아이였다. 앞머리를 멋들어지게 구루프로 말고 한참 유행하던 형광 연두색 야구 모자를 쓰던 키가 크고 유쾌하던 친구.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벙벙한 바지에 체크남방을 허리에 묶고 다니던 친구였다. 우리는 금세 친해져서 늘 붙어 다녔는데 성적표에 담임선생님이 ‘모방심리가 강하다’는 표현을 부정적으로 쓰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바로 사춘기의 특성 아닌가. 또래집단에서 인정받고 싶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비슷해지는 거 말이다.


이 친구가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오고 나서 엄마에게 어울리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그 후로 정말 어울리지 않았는지 중학교에 올라가며 자연스레 소원해졌는지는 모르겠다.


중학교는 소위 ‘뺑뺑이’로 정해졌는데 나는 초록색 교복이 인상적인 연신중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의 사춘기가 활짝 만개하였다.




학교는 왔다 갔다 출석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아무 생각이 없다가 중학생이 된 나의 첫 담임선생님은 아담한 몸집에 나긋나긋한 목소리.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수학선생님이었다. 숫자는 산수일 때에도 두드러기 반응이 날 지경이었는데 수학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새 단장을 하고 나타나다니 더욱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다정한 담임 선생님 덕분에 난데없이 수학 시험을 잘 봐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어리둥절했고 선생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내적동기의 시작.


32번 최. 33번 이수민. 34번 박희영.


키 순서로 앉았던 것 같다. 앞뒤로 앉은 두 친구 최 양과 박희영과 나는 금방 친해졌고 절친이 된 우리는 중학교 내내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여기에 국민학교 동창 또 다른 최 양까지 같은 반에서 만나 우리 넷은 아무것에나 까르르 웃고 아무것에나 훌쩍거리며 짝사랑, 첫사랑, 연예인 덕질… 십 대 소녀들 다운 풋풋하고 명랑한 우정을 쌓아갔다.


최양은 서태지를 좋아했고 나는 양현석을 좋아했다. 최양은 서태지를 닮은 박군을 좋아했고 나는 양현석보다 조금 더 잘생긴 정군을 좋아했다. 짝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전하지 못한 마음의 숨죽인 두근거림이 모닥불처럼 꺼지지 않고 은근하게 타오르기 때문이다. 눈앞에 그가 보이면 시선은 회피하지만 심장은 가슴팍을 차고 나올 듯이 뛰어대고 전하지도 못할 쪽지를 적으며 혼자 슬며시 미소 지으며 전해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만 하다 끝나버리는 순진함에 그 매력이 있다. 자기도 고백하지 못하면서 친구의 짝사랑을 이어주려고 용기를 내는 발칙한 귀여움에 있다.


최양은 그림을 잘 그렸고 나는 영어에 환장해 있었고 박희영은 웃기고 화끈하고 어딘가 짠한 녀석이었다. 나는 희영이와 특히 심장이 서로 얽힌 것처럼 가깝게 느꼈는데 그건 아마도 발랄한 겉모습에선 볼 수 없는 그 아이가 가진 숨겨진 슬픔 때문이었을 거다. 나는 이 친구들에게 난생처음으로 가정사를 고백했다. 희영이의 가정사가 후에 복잡하게 되었을 때 적어도 나에겐 말해 줄 수 있었던 것이 아마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희영이는 갈색이었다.

피부도 누리끼리했고 머리카락도 그랬다. 염색을 했었는지 원래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최양도 누리끼리했지만 최 양의 갈색이 아이보리와 밝은 금빛이 나는 갈색이라면 희영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톤 다운된 갈색이다. 나도 피부가 까만 편이었어서 우리의 공통 톤은 브라운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진심이었고 서로가 소중했으며 함께라서 행복했다. 학교 근처에 살던 최 양의 집은 우리의 아지트가 되어서 우리는 자주 최 양의 집에서 노래를 부르며 녹음을 했다. 우리의 우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2학년에 우리는 각자 단어 하나씩을 골라 한 글자씩 조합해 봉. 리. 깜. 랑.이라는 요상한 이름으로 우리의 우정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꽃봉오리의 봉. 우리의 리. 깜찍함의 깜. 사랑의 랑.

봉리깜랑.

무언가에 애정이 깊을 때 우리는 이름을 붙여준다.


카세트테이프에 정교하게 녹음한 봉리깜랑의 우정앨범은 두 개나 된다. 직접 지은 시와 편지와 그림. 그리고 혈서?!로 완성된 포스터를 코팅해서 나눠가지기도 했다. 지금도 가지고 있으면 참 재미있게 보았을 텐데 아쉽게도 여러 번의 이사를 거치며 다 사라지고 카세트테이프 하나쯤은 짐 어딘가에서 본 듯도 하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최양은 예고 준비를 위해 미술에 올인했고 나는 공부에 재미를 느끼던 차였다. 연합고사를 앞두고 희영이는 공부가 버거웠고 자연스레 다른 무리의 아이들에 섞이기 시작했다. 희영이가 공부를 포기하는 것이 곧 인생을 포기하는 것만 같아 안타깝고 슬펐지만 같은 또래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희영이가 멀어진 가장 큰 이유는 복잡해진 가정사에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능력밖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영혼의 단짝과도 같던 희영이가 멀어져 가는 것을 가슴 아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모두 인문계 고등학교에, 희영이는 상고에 진학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에는 수능준비로 바빴거니와 진작에 연락이 끊어져 생사도 알 수가 없었다. 요즘처럼 sns도 없었으니 눈에 안 보이면 소식을 모르던 때라 풍문으로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궁금하다. 내 소중한 친구 희영이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봉리깜랑의 봉, 박희영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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