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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양 Feb 23. 2024

수선화 덕분에

겨울에 고하는 미안함

집 앞에 수선화가 활짝 피었다. 벌써 몇 주 전부터 아직 낙엽을 치우지도 못한 화단에 싱그럽지만 씩씩한 초록의 병사들이 늠름하게 고개를 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기다랗게 볼록하며 끝은 뾰족한 꽃망울이 맺혔더랬다. 그리고는 잠시, 아주 잠시 공기가 따뜻해진 틈을 타 며칠 만에 꽃이 만개했다. 키가 큰 수선화 사이사이로는 보라와 연보라색의 키 작은 크로커스가 피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크로커스의 다물어진 꽃잎은 태양의 궤적을 쫓기라도 하는 듯 해가 떠오르면서 점점 열린다. 그러면 아침엔 온통 보라색이던 것이 한낮에는 햇빛을 닮은 주황에 가까운 노란 꽃술을 드러낸다. 수선화가 만개한 우리 집 앞뜰은 밤사이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햇빛을 받으며 땅에서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가족은 하루에도 몇 번씩 꽃 길을 걷는다. 노란 수선화와 주황을 품은 보라색 크로커스가 양쪽으로 늘어선 보도를 지나야 현관이 나오기 때문이다. 레드카펫이 전혀 부럽지 않은 꽃길이다.


노란색의 수선화는 매우 진부한 표현지만 '봄의 정령'이다. 지리하게 이어지는 회색의 하늘과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며 종일 이어지는 비에 물릴 때쯤, '아, 이제 그만 좀 하지' 말이 나올까 걱정이 되는 듯 수선화는 서둘러 봄소식을 전한다. '걱정 마, 멀지 않아. 거의 다 왔어.'

나뭇잎 다 떨어진 헐벗은 나무 발치에 때 이른 봄이 솟아나는 것이다. 지치지 말고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온몸으로 응원한다.


수선화 초록잎의 등장과 함께 '이제 봄이 오려나'하는 희망이 생길 무렵, 아직 미련이 남은 겨울은 퇴장을 거부하며 마지막 심술을 부린다. 한 달도 훨씬 전에 햇빛이 잘 드는 남향의 땅 속에 숨어있던 수선화 한 무리가 그 누구보다도 일찍 꽃을 피웠는데 그다음 주에 바로 영하권으로 떨어졌다. 산책길에 만난 그 용감한 수선화 무리는 마치 가장 용맹한 용사들로 구성된 선발대 같다.

'우리가 앞장서자. 사람들이 긴 겨울로 힘들어하고 있어. 희망을 심어줘야 해.'


문득, 작년에 인터넷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스케치 하나가 떠오른다.

'태양의 따스함이 느껴져. 새들이 노래하고 있어. 자연이 깨어났다고! 싹을 틔울 때가 된 거야!'

'바부팅이'





집에서 나와 꽃길을 걸어 산책길에 나섰다가 문득 최근 눈이 내렸다는 한국의 소식이 떠올랐다. 봄이 오는가 했더니 함박눈이 내려 새하얀 겨울왕국이 되었다. 우리가 모두 봄을 기다리는 사이 겨울이 서운했나?

세상 많은 이들이 한 마음으로 어서 빨리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곧 어서 빨리 겨울이 떠나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니 겨울의 입장에서는 참 서글픈 상황이다. 심술이 날 만도 하다. 순간 조금 미안함을 느꼈다. 무언가가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죄의식을 불러온다. 한 번도 겨울은 두 팔 벌려 맞아 준 적이 없는 것도 깨달았다. 겨울은 늘 견뎌내는 시기였다. 특히 영국에서는.


그래, 좀 서운하겠구나. 초대해 놓고 저 사람은 언제 가나 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면 좀 슬프겠네. 집어넣었던 부츠를 다시 꺼내 신고, 카디건 한 겹 더 겹쳐 입고, 손에는 장갑도 끼고서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서글프게 흘러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막아내며 마음속 작은 목소리로 말해 본다.

'알았어, 내가 조금 더 견뎌볼게. 수선화 덕인줄이나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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