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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양 Mar 05. 2024

오병이어

Soup Lunch

매 달 첫 번째 금요일은 ‘Soup Lunch’ 봉사를 하는 날이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 딸린 홀에서 자선행사로 점심 식당이 열린다. 세 가지 종류의 홈메이드 수프와 세 가지 종류의 홈메이드 디저트를 봉사자들이 집에서 만들어 와서 판매한다. 집에서 만든 잼이나 과자, 손뜨개 작품들도 한편에서 판매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수익금은 전액 몇몇 자선 단체에 나누어 기부된다. 수프와 빵, 디저트, 커피나 차까지 포함한 세트 메뉴의 가격은 6파운드. 매우 저렴한 편이다. 손님들은 주로 성당 교우들이거나 간혹 옆동네 성당이나 다른 교회에서 오시기도 한다. 일반 주민들도 와도 되지만 주로 주보를 보고 신자들이 온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노인들이다.


내가 봉사에 참여한 지는 2년이 다 되어간다. 첫 시작은 한식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한국식 야채죽을 만들어보겠다고 자진해 나서면 서다. 당시카페에서 한식 테이크어웨이를 하고 있던 터라서 처음엔 내가 장사를 하려는 줄 알고 이 봉사의 책임자인 캐롤라인 할머니가 머뭇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곧 나는 봉사팀 아주 깊숙이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모두 80이 넘은 할머니들이 집에서 어린 자녀들을 키우던 50여 년 전에 이 모임이 생겨났다고 했다. 주름진 손, 검버섯 앉은 얼굴, 살짝 굽은 등의 할머니들이 새댁이던 시절이라니. 그 모습들은 어땠을까? 함께 늙어가는 지금 서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도 궁금하다. 다음번에는 사진이라도 보여달라고 해야겠다.


세월을 함께 지나며 쌓인 레시피들은 책자로 만들어졌다. 레시피 책은 판매도 하고 있지만 봉사자에게는 그냥 주셔서 나도 한 권 받아왔다. 판매하는 수프 대부분의 레시피가 들어있어서 나도 두어 번 자진해서 ‘당근 고구마 수프’ 같은 걸 만들어 가져가기도 했다. 레시피를 보며 느끼지만 이 나라의 수프는 정말 간단하다. 재료를 넣고 스톡큐브를 녹인 물에 끓이다가 블렌더로 갈면 끝이다. 어차피 갈 것이니 재료도 아무렇게나 썰어도 된다. 우리네 곰탕이나 육개장, 하다못해 된장찌개 김치찌개는 육수 우리는 것부터 시작해 재료 다듬기 등 얼마나 일이 많은지.


이 봉사 모임이 시작되던 초기부터 리더를 맡고 계신 캐롤라인 할머니가 보통 재료비가 많이 드는 고기류가 든 수프를 맡으신다. 수프의 세 종류에 하나는 육류가 들어가고 두 가지는 채소만 들어간다. 주방에서 일을 하든, 홀에서 서빙을 하든 상관없이 수프와 디저트를 한 가지씩 나누어 맡아 만들어 온다. 영국의 아주 흔하디 흔한 디저트인 ‘크럼블’도 매번 과일 종류만 바뀌어 준비된다. 여기에 따뜻한 케이크종류 한 가지와 차가운 디저트 한 가지가 더해진다. 최근에는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글루텐 프리’ 크럼블도 조금 만드신다. 나는 베이킹에 재주가 없어 가끔 수프를 만들어가거나 봉사가 끝나고 들어앉아 스태프 런치를 먹을 때 나눠먹을 한국식 닭봉 조림이나 김밥 같은 음식을 따로 만들어 가기도 한다.





지난 금요일 수프 런치의 메뉴는 닭고기 수프와 당근수프, 그리고 감자와 파 수프가 있었다. 내가 조금 빠듯하게 도착하니 할머니들이 수프를 데우며 속삭이고 계셨다.

‘늦게 오면서 차가운 수프를 가져오다니 말이야.’

아마도 푸른빛 도는 감자수프를 가져온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인 듯 했다. 평소보다 파가 많이 들어갔는지 유난히 푸르른 수프 색을 보면서도 한 소릴 하셨다.

‘대단히 영국 스러운 모습이군.’ 앞에서는 싫은 소리 않고 뒤에서 투덜대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캐롤라인 할머니가 한 스푼 떠서 맛을 보고는 인상을 쓰셨다.

“엥? 왜 시큼하지?”

나도 한 숟가락 떠서 맛을 보았다. 식초를 넣은 것 같은 맛이었다. 설마 상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하고 다시 떠먹어보곤 풍미를 위해 식초를 첨기하셨는가 보다고 했다.

하지만 캐롤라인 할머니는 ‘늦게 오면서 차가운, 이제는 시큼하기도 한’ 수프를 만들어 온 장본인을 소환하셨다. 조시 할머니였다. 본인이 직접 한 수저 뜨시더니 조시 할머니는 침착하게

“음, 나도 동의해. 시큼하네. 상했나 보네.” 하셨다.

나였다면 일단 ‘히익-’ 하면서 일단 숨을 과장되게 몰아 마시고는 ‘어떡해’와 ‘죄송해요’를 백만 번쯤 말했을 터였다.


세 가지 수프 중에 한 가지를 못쓰게 되었으니 선택 옵션이 하나 줄었다는 것 말고도 수프의 양이 그만큼 줄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평소 평균 6-70명의 주문을 소화하고 열명 남짓 되는 봉사자들의 점심까지 커버해야 하는 양인데 스태프 런치는 고사하고 판매에도 모자랄까 봐 나는 그게 걱정이 되었다. 캐롤라인 할머니는 재빨리 한 사람을 보내 근처 슈퍼에서 비상용 수프를 몇 개 사 오도록 했고 서빙팀은 두 가지 수프만 주문 가능하다고 손님들에게 반복해서 설명해야 했다. 당근 수프의 농도가 살짝 되직해서 물을 조금 첨가해 묽게 만드는 바람에 양이 좀 늘었지만 그럼에도 내 눈에는 도무지 두 가지 수프로 서빙을 다 하지는 못 할 것 같았다. 홀 서빙을 하시던 조시 할머니가 이따금씩 수프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으셨다. 겉으로 티는 안내도 걱정이 되신 모양이다.


열 두시에 시작한 점심 서빙이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수프를 서빙하고 끝나면 디저트, 그리고 커피와 홍차가 마무리다. 나는 주방의 프런트에 서서 들어오는 주문을 수프팀에게 전달하고 할머니들이 담아주시는 수프를 서빙하는 쟁반으로 배달한다. 들어오는 빈 그릇은 싱크대로 옮겨둔다. (캐롤라인 할머니가가 하시던 일인데 이제 나에게 맡기시고 본인은 설거지를 하신다.) 수프가 끝나면 디저트 코너가 바빠지고 나는 그 뒤에 들어올 커피와 홍차 주문에 대비해서 찻잔에 미리 커피를 한 숟가락씩 넣어두고 주전자에 홍차를 미리 만들어둔다. 차를 너무 빨리 만들어 두면 식거나 차가 너무 진해져서 타이밍을 적절하게 가늠하는 게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가 너무 진하다거나 연하다거나 차가 너무 연하다는 피드백이 돌아올 때도 있다.


바쁘게 휘몰아치던 주문이 잠잠해지고 마감 시간이 다가와 수프 솥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두 개의 솥 안에는 아직도 충분한 양의 수프가 남아있었다.

오병이어.

빵 다섯 덩어리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셨다는 예수님의 기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슈퍼에서 사 온 수프는 뜯을 필요도 없을뿐더러 스태프 모두 먹고도 솥에는 수프가 남았다.

캐롤라인 할머니는 철저하게 자원봉사로 이루어지는 이 점심 식당을 운영하며 위기 아닌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어떻게든 늘 해결이 되었다며 우리는 ‘보호받고 있다’고 웃으셨다.


식사를 마치고 다음 달 메뉴를 함께 정하고 분담을 하며 당근 수프를 만들어오겠노라는 조시 할머니에게 캐롤라인 할머니는,

“좋아, 조시가 당근 수프 한 솥 만들고, 이번엔 냉장고에 잘 넣고~” 하고 웃으며 뼈 있는 농담을 던지셨다.

이 역시도 참 영국 스럽다고 생각했다.


한 달에 한번, 나는 귀여우시며 다정하시며 때로는 영국식 유머로 뒤통수도 치시는 할머니들과 함께 이렇게 기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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