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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양 Apr 21. 2023

꿈을 꾸는 자, 비용을 지불하라.

애벌레는 번데기 과정을 뛰어넘을 수 없다.

'런던보다는 복스힐이 낫겠어.'


차를 돌렸다. 런던에 가겠다고 핸드백을 들고 늘 신는 워킹 부츠 대신 스웨이드로 된 앵클부츠를 신고 나왔기 때문이다. 눈에 밟히는 강아지들을 뒤로하고 매몰차게 나왔는데 다시 집에 돌아가야 한다. 그래도 최소한 신발은 갈아 신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현관문에 닿기도 전에 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강아지 두 마리가 차 소리를 듣고 문 앞에 와서 짖고 있다. 신발만 갈아 신고 나가려고 했는데 괜스레 마음이 짠하다. 아침 산책을 시켜주지 못해 미안해서 한동안 쓰다듬어 주다가 간식 하나씩 던져 주며 마음의 짐을 덜어보려 한다.


온 김에 가방도 바꿔야겠다. 요즘은 지갑도 현금도 없이 휴대폰으로 결제를 하기에 휴대폰만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니는데 런던에 간다고 오랜만에 들고 나온 핸드백을 결국은 오늘도 쓰지 못하게 생겼다. 위층에 올라가 작은 백팩을 꺼내 핸드백에 있던 휴대폰과 무선 이어폰을 넣고 남편이 아침에 내려놓고 간 커피가 담긴 텀블러도 찔러 넣는다. 노트북은 인터넷이 필요하고 배터리도 수명이 많이 짧아져서 포기하고 A5 사이즈 노트와 볼펜을 넣었다. 많이 필요 없다. 간단히 챙기고 휙 나가자. 빨리 나가는 것이 목표다.


어느새 나를 따라 올라온 강아지들을 애써 외면하고 앵클부츠는 다시 신발장에 고이 넣어두고는 이제는 내 몸의 일부가 된 듯 편한 워킹 부츠를 신고 나왔다. 결국 나는 오늘도 워킹 부츠를 신고 런던 대신에 녹음이 푸르른 복스힐을 선택했다. 갈수록 시골쥐 생활이 편해지는 모양이다.

워킹부츠와 앵클부츠와 아련한 눈빛의 리플리


오전에 글쓰기 모임이 있어서 운전을 하기 전에 휴대폰을 세팅하고 온라인 미팅에 접속했다. 안전벨트를 매고 핸들의 일부가 살짝 보이는, 누가 봐도 운전 중인 모습으로 화면에 등장하자 글쓰기 멤버들이 묻는다. '어디 가시나 봐요.' '집 나가는 중이에요.' 집 나가는 중이라니. 하긴, 지금 이 마음은 외출이라기보다는 가출에 가까우니 집 나가는 중이 아주 다른 말은 아니다.


10여 분 거리를 운전해서 복스힐에 도착. 삼 일째 파란 하늘을 보여주는 날씨에 감탄하며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셀카봉을 들고 멤버들과 온라인으로 대화를 이어가며 가끔씩 카메라를 전환해 멋진 복스힐의 모습도 공유했다. 원래 같으면 앞에 잠깐 인사를 나누고 각자 조용히 글쓰기를 하는 시간인데 내가 '집을 나오는' 바람에 대화가 길어져 결국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멤버들은 내가 어떤 마음인지 이해를 해 주었고 각자 가지는 고민과 고충도 나누어주었다. 복스힐 정상에 올라 테이블에 자리를 잡기 전, 한 분이 말했다. '가끔씩은 꿈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라고. 꿈이 있어 도전하고 고전하는 것이 때로는 힘에 겹기 때문이다. 그 말이 내 마음을 울려 나는 눈물을 쏟고 말았다. 다행히 밝은 햇살에 얼굴이 아주 하얗게 보여서 들키지는 않았지 싶다.


날씨 좋은 날에 복스힐 (좌), 햇빛 받으며 야외 글쓰기 (우)


그렇다. 우리는 꿈이 있어서, 꿈을 좇는 대가를 이렇게 치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살면서 나도 종종 생각했던 문제다. 나는 왜 자꾸 현재에 만족을 못 하는 걸까. 아무렇지 않게, 아니, 행복하게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고 살림을 하며 집에 있어도 행복한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퍼부었었다. 나는 왜 저런 소소한 행복을 못 느끼지? 왜 나는 늘 부족하다고 느끼지? 왜 나는 자꾸 바뀌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괴롭히지?


큰아이가 두 돌이 되기도 전에 당시 극심한 산후 우울증을 우울증 인지도 모르고 겪고 있던 나는 가끔 일을 할 수도 없으면서 이력서를 보내곤 했다. 친정 부모님도 가까이 안 계시고 시부모님은 시누의 아이를 봐주는 것이 약속이 되어 있어서 나는 정말 홀로 아이를 보아야 했다. 그래서 일을 한다는 것은 그저 허망한 꿈과도 같은 것이었는데도, 그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행위를 해야 했다. 이력서를 쓰고, 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하면 아직도 나를 원하는 곳이 있다, 나는 아직 쓰임이 있다는 확인을 하며 위안을 얻었다.


한 번도 시부모님 말고는 누구에게도 아이를 맡겨 본 적도 없는데 그때는 그것이 너무나 간절하여 '차일드 마인더'라고 하는, 한국으로 치면 '돌보미 선생님'쯤 되는 낯선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고 큰 호텔 체인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아이는 돌을 겨우 넘겼었다. 퇴사한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감을 잃지 않았던 터라 면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면접을 무사히 마치고 아이를 데리러 차일드 마인더의 집에 갔다. 낯선 이와 낯선 곳에서 다행히 아이는 잘 있었다. 최소한 차일드 마인더의 말에 따르면.


면접 잘 보고 왔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고는 나도 모르게 주저리주저리 내가 왜 면접을 보러 갔는지, 사실은 붙어도 일을 할 수도 없다며 떠들다가,

'나는 이렇게 예쁜 아이도 있고, 성실하고 다정한 남편도 있고, 이제 세 식구 살 집도 있는데 도대체 왜 불행한지 모르겠어요.' 하고는 목놓아 울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초면에 그분이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다.


그 후로도 가끔씩 나는 그런 순간들을 만났다. 15년을 전업주부로 집에 있으면서 괜찮은 듯 잘 사는가 싶다가도 치료를 미루어 이따금씩 부어오르는 잇몸처럼 이런 기분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것이었다. 영국에 처음 와서 힘겨운 겨울을 나면서는 이게 전적으로 날씨 탓이라고 생각했다. 해를 보지 못해 그런 거라고 강력하게 믿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는 해가 쨍쨍한 한 여름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적잖이 당황했었다. 해도 나는데 왜 이래... 날씨가 나쁠 때는 나빠서 기분이 안 좋고, 날씨가 좋을 때에는 나는 죽을 것 같은데 날씨만 좋아서 억울했다.



갈매기 조나단 책을 읽고 있다. 어려서 읽었을 때에는 그저 아웃사이더 갈매기의 비행 이야기로만 이해했다. 나는 게 좋은 갈매기의 성장 이야기쯤으로 기억했다. 영짹방에서 갈매기 조나단으로 수업을 하면서 다시 읽은 책은 마치 처음 읽는 책 같았다. 이게 내가 아는 이야기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갈매기 조나단은 너무나 분명한 꿈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위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조나단에게는 천 년 동안 이어진 수동적이고 반복적이며 먹이만을 찾아 최선을 다해 생존만 하는 갈매기의 삶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원하는 바가 분명했고 그것을 좇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았다. 마침내 비행 기술을 마스터했을 때 그는 삶의 목적을 찾았다고 했다. 자유를 찾았다고 했다. 조나단이 부러웠다.


나도 고깃배 주변을 맴돌며 던져주는 생선 대가리나 오래된 빵 쪼가리를 받아먹으며 사는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 그런데 나는 그래서 조나단의 비행처럼 하나의 분명한 꿈을 좇고 있는가 하면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현실에 불만족스럽긴 한데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멋지게 날며 비행기술을 연마하는 것인지, 고깃배 주변을 맴돌며 생선대가리 따위를 먹느니 다른 먹이를 찾아 떠나가는 것인지, 고깃배가 던져주는 먹이를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으로 얻어내고 싶은 것인지 그 답을 모르는 것 같다. 이쯤에서 또 떠오르는 방탄소년단의 노랫말.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꿈을 꾸는 대가로 뫼비우스의 띠 같은 고민의 늪에서 평생을 허우적거려야 한다고 해도, 그래서 그것이 참을 수 없이 힘들다고 해도 '꿈을 꾸는 자'는 '꿈을 꾸지 않는 자'가 될 수 없다. 마음대로 되고 안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원하지 않아도 어느새 나는 또 다른 형태의 고민을 하며 또 다른 형태의 꿈을 꾸고 있을 테니까. 꿈을 꾸는 자는 꿈을 꾸는 것을 멈출 수 없고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는 과정을 건너뛸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처럼 꿈을 꾸는 나는 꿈을 꾸는 대가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즐기기'까지는 힘들더라도 원래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자. 번데기를 거쳐야 나비가 되는 것을 잊지 말자.


꿈을 꾸는 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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