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의 소울에 서울의 맛을 배달하다
지난주에 단골 고객의 김치 주문이 들어왔는데 한 번에 모아서 하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 이번 주에 배추 배달을 받았다. 요즘 배추 가격이 50프로 정도 올라서 잠시 김치 만들기를 주춤하는 중이다. 동네 야채 가게 아저씨 스티브가 매주 화, 목요일 새벽에 도매 시장에서 장을 볼 때 내가 주문한 배추도 사다 주는데 나는 배추의 질이나 가격 모두 그저 그에게 맡겨둔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배추 가격은 유동적이고, 어떤 때는 배추가 아주 실하기도 하고 어떤 계절에는 반으로 쪼개보면 안에 꽃대가 있을 때도 있다. 배추가 더 두툼하거나 더 얇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 유럽에서 구할 수 있는 배추는 한국으로 치자면 알배기 배추 수준이다. 크기도 4분의 1 정도로 작고 잎 부분보다 하얀 줄기 부분이 더 많다. 그래서 애들은 좋아하지만 그렇기에 절이는 것이 아주 힘들다.
정말 어이없는 과정을 통해 한식 브랜드 Seoul 2 Soul을 만들고 김치와 한식 장사를 한 것이 2년이 되어간다.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그렇게 했나 싶게 때로는 무모하고 때로는 용감무쌍하게 나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 정점은 아마 동네 카페를 빌려 주말에 한식 테이크어웨이를 한 것인데, 그 카페가 바로 얼마 전 mbc에서 방영한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영국 편에 나오는 로비의 카페 RYE Cafe다. 로비는 동네에서 인심 좋고 사람 좋아 평판도 좋은데 지난 2021년부터 자신의 카페를 다른 스몰 비즈니스에게 주말에 빌려주고 있다. 요즘도 하고 있는 업체가 있는 듯하지만 내가 참여했던 2년 전이 아마 가장 활발했던 때였던 듯싶다.
한식 브랜드 Seoul 2 Soul을 만들고 구청에 신고를 하고 오픈 날짜를 정해 동네 페이스북 페이지에 광고를 올렸다. 한 번도 음식을 만들어 판 적이 없으니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을 할지 몰라 일단 쉽다고 생각한 김밥을 팔아보자 싶어 첫 메뉴는 김밥으로 정했다. 원가 계산도 못하고 돈에 대한 개념도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가격은 한국 슈퍼마켓에서 파는 김밥 가격으로 잡았는데 나중에야 대량생산을 하는 슈퍼마켓의 가격을 소량으로 만드는 내 음식에 적용을 한 것이 실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로나 판데믹 중에 나처럼 집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하는 작은 사업체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중에는 집에서 칵테일을 만들어 유리병에 담아 문 앞에 배달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천으로 마스크와 손수건을 만들어 파는 둘째 아이 학교 엄마도 있었다. 작은 동네이니만큼 스몰, 혹은 그보다도 작은 나 같은 마이크로 사업체들이 생길 때마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 내가 덜덜 떨면서 나를 무대 위에 올려 대중에게 나와 내 비즈니스를 소개하고 메뉴를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응원의 댓글을 달아주었고 일부는 DM을 통해 주문을 바로 하기도 했다.
드디어 대망의 오픈 날. 나는 김밥을 미리 만들어 두지 않고 최대한 픽업 시간에 맞춰 신선하게 만들겠다고 욕심을 부렸고, 그것은 결국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문전성시도 아닌데 주문 시간에 쫓기며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겨우 시간에 맞춰냈다. 영국에 있는 한국 슈퍼에서 사는 김밥김은 한국에서 사는 김과 뭐가 다른 것인지 한국에선 집에서 김발도 없이 후딱 잘 말았었는데 이 김은 김 끝에 물을 묻혀야 겨우 붙었다. 칼도 잘 갈아 놓는다고 했는데도 혹시나 썰다가 김밥 옆구리가 터질까 염려가 되어서 승모근에 힘을 잔뜩 준 채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김밥을 썰었다.
주문이 많지 않았음에도 오픈 첫날을 정신없이 보낸 나는 저녁이 되자 긴장이 풀려서 뻗고야 말았다. 어떤 성취감과 뿌듯함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몸은 노곤해졌다. 남편은 잘했다고 한껏 칭찬을 해 주며 나를 위한 것인지, 본인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레드 와인을 사 와서 축하주를 나누었다. 어쨌든 시작은 한 것이다. 바로 이거구나. 일단 시작을 하라고 했던 말이. 뭐든 시작을 해야 발전시키고 개선할 수 있다고 한 말이. 2주 동안 스타트업 수업에서 참 중요한 것을 배웠구나. 사업도 사업이지만 나는 오랫동안 꽁꽁 싸매고 숨어있던 동굴에서 한 걸음 걸어 나온 기분이었다. 돈을 벌었는지 안 벌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았다. 나는 그저 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중이니까.
다음날 아침. 모두 등교하고 출근하고 혼자 늘어져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오늘은 편하게 지낼 생각에 잠옷바람이었는데 잠옷이라 해도 진짜 잠옷용 잠옷이 아니라 몇천 원짜리 싸구려 면티를 입고 있는 거라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를 것이니 그냥 문을 열었다. 새로 이사 온 건넛집 여자였다.
"하이, 수, 잘 지내지? 내가 이야기할 게 있어서 건너왔는데, 혹시 어제 집에서 장사를 한 거야? 여기는 프라이빗 로드라 장사를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우리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게 여기가 조용한 프라이빗 로드라서 온 거거든.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집에서 장사를 할 계획인지 물어보려고."
......
나는 완전 무방비로 급소를 공격당한 기분이었다. 너무나 당황해서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도 안 난다. 다만 나는 나의 이 보잘것없지만 의미심장한 재기의 발판이 개시 하루 만에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생글생글 웃으면서 할 말 다 하는 이 얄미운 여자의 얼굴 위에서 보았다. 앞으로도 계속 집에서 장사를 할 계획이냐고? 계획?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그냥 시작한 거다, 왜? 여기가 조용해서 이사 왔다고? 웃기도 있네. 요즘 매물이 안 나오는데 그나마 나온 것 중에서 고른 거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개시 바로 다음날에 아침 댓바람부터 이렇게 찾아와? 너는 생각이 없니? 감정도 없어?라고 그녀가 자기 할 말 다 하고 쌩가버린 후에 멍하니 허공을 보며 머릿속으로 한 말이다.
이웃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온 이상 더 이상 집에서 장사를 할 수는 없었다. 아니, 적어도 차들이 막다른 이 클로즈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는 없었다. 실은 장사를 할 길이 막혔다는 것보다 나의 살고자 하는 노력에 딴지를 거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지금 같아서라면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하고 무시했겠지만 당시에 나는 아직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의사와 면담을 하던 터라 이웃여자의 무례함이 나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졌다. 워낙 이웃 남자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남편은 아주 부부가 쌍으로 재수 없다며 이를 갈았다. 평소 같으면 속 좁다고 느꼈을 남편의 이런 태도가 그때는 참 고마웠었다.
집에서 픽업이 불가능해지자 나는 배달을 해야 했다. 아쉬테드는 작은 빌리지니까 혼자 배달을 해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무모한 생각이었던지. 광고를 올리고, 주문을 받고, 음식을 만들고 배달까지. 나는 1인 4역을 하고 있었다. 내가 손바닥만 하다고 생각했던 아쉬테드는 일분일초가 바쁜 배달시간을 겪고 나서야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아쉬테드를 가로지르는 기찻길에서 기차라도 만나면 꼼짝없이 차단기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정신이 없는 나머지 흰쌀밥을 잡곡밥 오더에 넣기도 하고 (그때는 그랬다. 열정이 넘친 나머지 밥도 쌀밥, 잡곡밥 두 가지로 주문을 받았다...), 주문 순서가 뒤바뀌기도 했다. 혼자서 감당이 안되자 남편에게 은근 말을 꺼냈더니 남편은 종일 회사일 하고 들어와 배달까지 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것 또한 매우 서럽고 원망스러웠지만 사실 남편은 이미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몇십 년째 꾸역꾸역 하면서 매일 스트레스 가득 안고 퇴근을 하는 사람이라 나도 큰 기대는 없었다.
도저히 배달은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손님들이 음식을 가지러 오게 해야 하는데 차가 안에까지만 오지 않으면 되는 거였다. 우리 집이 있는 작은 클로즈는 말하자면 개미집 모양처럼 둥그렇게 막다른 주머니 모양인데 그 안에 여섯 가구가 모여 있다. 그러니까 손님들의 차가 그 개미집 입구까지만 오거나 근처에서 잠시 정차할 곳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우리 클로즈와 멀지 않은 골목이 한산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 골목에 잠시 정차를 하고 나에게 연락을 주면 내가 달려 나가 음식을 전달하는 식이다. 말 그대로 나는 달려 나갔다. 참 서로가 불편하고 프로페셔널과는 거리가 먼 방법이지만 당장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단골들이 생기면서 몇몇에게 사연을 털어놓기도 하고 같이 내 이웃 욕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장사는 이어가면서 단골들도 생기기 시작할 무렵 페이스북에서 로비의 라이 카페가 '숍인숍'을 하는 것을 보았다. 로비의 라이 카페는 코로나 직전에 오픈을 해서 몇 번 가 본 곳이다. 집에서도 멀지 않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한참 동안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집에서 장사를 하는 것과 정말 업장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느낌부터가 너무 달랐다. 어떻게 나 따위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라이 카페 옆 스티브 아저씨의 채소가게에서 배추를 픽업하던 어느 날 아저씨가 장사는 잘하고 있냐고 물었고 나는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스티브 아저씨는 로비가 라이카페를 주말에 빌려주는 것 같던데 한번 해보지 그러냐고 했다. 나는 솔직하게 겁이 나서 생각만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겁 낼 필요 없다고, 해보고 아니면 다시 집에서 하면 되지 않느냐고 용기를 주었다. 그렇지. 해보고 안되면 말면 되지 뭐.
하지만 내가 망설이는 사이 로비의 카페는 이미 다른 두 업체가 이용을 하게 되었다. 할 수는 있는데 주저할 때 보다 이제 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되자 갑자기 더 간절해지는 건 무슨 심리인지. 맘을 단단히 먹은 어느 날, 나는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끌어모아 카페를 찾아갔다. 플라스틱 그릇에 카레덮밥을 담아 가져가서 내 소개를 하며 혹시라도 나중에 자리가 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서둘러 도망 나왔다. 마치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쪽지를 전해주고 걸음아 나 살려라 꽁무니 빼는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정말로 로비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는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기뻐서? 아니, 무서웠다. 용기를 내어 일은 저질러놨는데 막상 연락을 받으니 내가 미쳤었나 싶기도 하고, 이번이 기회다 싶기도 하고 십 초마다 기분이 빈대떡 뒤집듯 뒤집혔다.
미팅을 하는 날 로비와 앉아 간단히 나의 작고 아담한 사업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했고 솔직하게 너무 무섭다고도 했다. 그는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첫날에 자기가 같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로비의 카페에서 2주에 한번 토요일에 한식 테이크어웨이 장사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