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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날 Jan 14. 2023

[독서일기]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고명재

혹시 시집도 읽으시나요?

"혹시 시집도 읽으시나요?"

"네? 네."라고 짧게 대답을 했다.


우리 동네에는 작은 빵집이 있다. 치아바타와 시골빵 같은 식사빵이 아주 맛있어서 자주 빵을 사러 간다. 출근을 하지 않는 토요일 아침이면 빵이 가장 맛있는 시간에 빵집에 갈 수 있다. 오픈은 10시지만, 늘 조금 일찍 갓 구운 빵이 준비되어 있어 나는 오픈 시간 전에 빼꼼히 빵집 문을 연다. 오늘은 따뜻한 커피에 호두크랜베리시골빵과 블루베리스콘을 주문했다. 빵을 기다리는 시간, 늘 그렇듯 아직 오픈 전인 가게엔 우리 밖에 없다. 작은 빵집에는 사장님이 읽다가 꽂아둔 책이 여러권 있었는데,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 황정은의 에세이 <일기>와 최승자 시인의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신형철 작가의 <인생의 역사>까지 빵집 사장님이 책을 꾸준히 읽는다는 사실과, 독서 취향도 자연스럽게 짐잠해볼 수 있었다.   


사장님께서 노오란 작은 시집을 건네주셨다.

"친형이 시집을 냈는데, 선물하고 싶어서요. 한번 읽어보세요." 1년 전 쯤이었나. 동네 책방에서 진행한 김혼비 작가의 북토크에서 빵집 사장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그랬듯이, 빵집을 자주 찾는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셨으리라. 시인의 짧은 글귀와 내 이름까지 적은 귀한 시집을 선물해주셨다. 그렇게 고명재 시인의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이라는 시집을 만났다.

어느 여름날, 나를 키우던 아픈 사람이
앞머리를 쓸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온 세상이 멸하고 다 무너져내려도
풀 한 포기 서 있으면 있는 거란다.

있는 거란다. 사랑과 마음과 진리의 열차가
변치 않고 그대로 있는 거란다.

2022년 12월
고명재


시인의 첫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소리내어 읽어본다. 어떤 의미로 이 문장을 쓰셨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나를 응원해주는 것 같은 힘이 느껴졌다. 단번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시는 아니지만 문장을 읽고, 또 읽고 곱씹어보게 된다. 가족에 대한 진한 마음이 느껴져서 노오란 표지처럼 따듯한 봄날을 만나는 것 같았고, 이른 아침에 소복이 내린 하얀 눈을 뽀드득 뽀드득 하고 조심스럽게 한 발, 또 한 발 내딛는 그런 순수함을 만나는 것 같았다.


엄마가 잘 때 할머니가 비쳐서 좋다            떠난 사람이 캄캄하게 보고 싶어서


아이스크림처럼 부모는 늙어버렸다


내 그리움 속엔 왕릉만한 비탈이 있어서


오늘은 우리 동네 작은 빵집에 가는 날이다.

그래서 오늘도 좋은날이다.


201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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