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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Feb 04. 2024

시간제 예약석, 얼마까지 낼 수 있으신가요?

나의 부주의함에서 비롯한 선물

책과 술을 모두 좋아하는 나에게 천국과도 같은 공간이 있다. 마치 독립서점과 바를 합쳐 놓은 듯한, 주인장의 취향이 한껏 베인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방과 아늑한 조명이 무드를 더해주는 바의 콜라보랄까. 


언제부턴가 국내 여행을 가서 그 지역에만 있는 독립서점을 투어 하는 것이 내 여행의 컨셉이 되었다. 크고 넓은 대형서점에선 내가 어떤 장르의 책 진열대에서 무슨 책을 읽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다면 작은 서점은 그 공간이어야만 구현되는 분위기와 많이 꽂혀있는 책의 장르, 빈티지한 소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은 어떠한가. 집에서 편하게 마시는 혼술을 가장 좋아하지만, 가끔은 잔잔하고 따스한 느낌의 바에서 홀짝이는 와인이나 칵테일은 일상의 행복을 더한다. 편안하고 따스한 느낌이 동시에 실현되는 곳. 어린 시절로 치면 가장 좋아하는 스릴 있는 놀이기구를 타고 달콤한 솜사탕을 먹을 수 있는, 놀이동산과 같은 곳이다.






이곳 책바를 처음 알게 된 건 2018년 여름, 즉흥적으로 떠난 서울 여행에서 연희동 근처 독립서점을 찾아보다 발견한 곳이다. 첫 방문에서 나는 직감했다. 아 여기 자주 오고 싶을 것 같다. 그곳은 거짓말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책장에 예쁘게 꽂혀있는 책, 다양한 위스키와 와인, 조금은 어두운 실내를 따뜻하게 비추는 스탠드와 소파. 무엇보다 소설 속에 나오는 여러 가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도 낭만 있었다. 


이후 나는 종종 그곳을 떠올렸고 작년 11월 말, 서울 생활을 한 지 1년도 더 지난 이후에야 그곳을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공간은 망원동으로 이사를 한 후였다. 사업 규모를 확장하면서 공간은 더 넓어졌고 책장과 책들은 훨씬 많아졌으며, 이전엔 없었던 아르바이트생 한 분이 보였다. 방문객들이 늘어나면서 사장님 혼자 일하기엔 벅참이 있어 아마 함께 일할 사람을 뽑으신 것 같았다. 


예전과 동일한 것들도 눈에 띄었다. 책바에서는 매달 다른 주제로 진행되는 백일장 <빌보드차트>라는 이벤트가 있다. 하나의 주제가 주어지면 작은 포스트잇에 저마다의 경험과 생각을 담아낸다. 매월 당선작으로 선정되신 분께는 다음 주제가 끝나기 전까지 책바에서 One free drink를 마실 수 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쓴 짧은 단상은 의외로 깊은 공감과 울림을 주는 글들이 있다. 책바에 방문할 때마다 가장 먼저 나는 빌보드차트 게시판으로 눈길이 간다. 그 앞에 서선 몇 개의 글을 읽어보곤 찰칵. 꼭 사진을 한 장 찍는다. 사진을 찍는 건 언제 이 공간에 방문했다는 나만의 기록이자 사진에 담긴 그 글이 그날의 나에게 인상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날 나는 미리 원하는 좌석을 예약한 후 방문했다. 음식점이나 카페를 가기 전에 예약을 하는 일은 왠지 번거로워 평소 잘하지 않는 일이지만 이 날만큼은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자리에 앉아 온전히 나에게 집중해 그 시간과 공간을 보내고 싶어 예약을 했다. 사실 바로 다음날이 이삿날이었기에 이사를 하기 전에 서울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예약한 좌석이다. 사색의 방 A였나. 


벽면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다양한 위스키, 와인병과 책, 감각적인 스탠드의 조화가 예쁜 곳이었다. 한마디로 나의 취향저격이었다. 책바에는 대화가 가능한 바와 홀 좌석, 프라이빗 좌석과 몰입의 방이 있다. 내 기억에 저 좌석은 프라이빗 좌석으로 분류되었던 것 같다.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자리에 앉은 나는 내적 흥분을 감추기 위해 애써 노력하며 마시고 싶은 술을 찬찬히 골랐다. 책바의 시그니처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칵테일과 위스키를 마시는 것인데, 첫 방문에서 소설 속에 나오는 진토닉을 마셨으니 오늘은 다른 술을 마셔볼까 싶었다. 책바에 갈 때마다 새롭게 제조한 술이 눈에 띄는 점도 재밌었다. 이름마저 흥미로워 나처럼 새로운 술이나 음식, 경험에 열려 있는 사람이라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추운 날이었다. 패딩 점퍼를 여미고 목도리를 둘둘 감고 지도를 보며 찾아간 나는 따뜻한 술을 마시고 싶었다. 


뱅쇼. 오늘은 뱅쇼가 제격이다. 뱅쇼는 프랑스어로 '따뜻한 와인'이란 뜻으로, 와인에 여러 과일과 계피를 비롯한 향신료를 넣고 끓여 만든 음료수를 말한다. 나는 몸도 녹일 겸 고민 없이 뱅쇼를 주문하곤 서가에서 오늘 술과 함께 읽을 책을 살펴보았다. 인문, 경제경영, 에세이, 자기 계발서 등 다양한 장르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이 날만은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머무를 것이며, 이런저런 책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고작해야 앞쪽 몇 페이지씩 읽는 게 다일 것이다. 그럴 거라면 한 권의 책을 느긋하게, 읽을 수 있는 데까지 음미하며 읽는 것이 오늘의 내 목표였다.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을 눈으로 훑어보다 한 제목에 눈길이 멈췄다. 


'일의 기쁨과 슬픔'. 제목만으로 에세이일 거라 예상했으나 책은 단편소설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곤 평소 소설과는 가깝지 않은 나는 우연히 집은 이 책이 소설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제부터 너도 소설과 한번 친해져 보라는 운명의 계시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책을 펼쳤다. 알고 보니 작가는 알랭 드 보통의 수필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자리에 앉아 책의 초반부터 나는 빠르게 몰입되는 것을 느꼈다. 소설의 화자는 직장 스트레스에 지쳐있는 스타트업 직원이다. 안나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리얼리티한 이야기와 앞일이 어떻게 벌어질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글의 전개는 독자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나는 스타트업을 경험해 봤기에 소설 속 안나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으며 그녀의 감정은 어떨지 짐작되는 부분이 있었다. 안나의 생각과 감정에 공감하고 우리나라의 많은 직장인들의 입장에 감정이입해 가며 읽은 책은 벌써 절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책을 읽다 문득,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무드 있는 조명 아래 따뜻한 뱅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자각했다. 


'와, 지금 너무 행복하다. 좋다.'


나의 기호와 취향을 모두 충족한 곳에서 좋아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정말이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그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들여다보고, 여러 가지 것들을 경험해 봤기에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 내심 만족스러웠다. 






얼핏 시계를 보니 들어온 지 2시간 가까이 되어갔다. 책바의 기본 이용 시간은 2시간이었기에 곧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사장님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저.. 다른 메뉴 더 주문 안 하시나요?"

"네? 주문이요?"

"아, 저희 이 예약석이 원래 최소 주문 금액이 있는데 6만 원이거든요. 처음에 말씀드릴까 하다가 알고 계신 줄 알고.. 혹시 술은 더 안 드세요?"

"아, 그래요? 몰랐는데.. 잠시만요" 


순간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뱅쇼가 2만 원 정도였기에 한 잔 마시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예약하셨을 때 상세정보에 안내되어 있긴 했는데 혹시 확인 못하셨나요?"

"아.. 그랬군요. 제가 확인을 못했나 봐요."


평소에는 꼼꼼히 세부내용까지 잘 체크하다가 이곳을 예약할 때 미처 안내 문구를 보지 못한 나를 잠깐 자책했다. 이 공간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커 예약일자와 시간, 좌석만 확인한 채 이미 마음은 여기에 와 있었던 것이다. 프라이빗한 공간이긴 하지만 2시간 머무는 자리에 혼자서 6만 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하기에는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 기준엔 말이다. 


만약 친구와 2명이서 방문했다면 인당 3만 원인 셈이니 기분 좋게 즐기고 낼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오늘은 혼자서 2인 자리를 독차지했기에 2인의 최소 주문 금액을 맞추어야 했다. 만약, 사전에 최소 주문 금액을 확인했다면 좌석 예약을 하지 않고 편하게 방문해 워크인 좌석에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2시간 예약 좌석에 그 금액을 혼자서 지불하기에 아직 나는 주머니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원망도 잠시, 빨리 이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지금 시각은 오후 9시. 원래 머무를 예정이었던 2시간이 지났고 이때 나는 술이나 다른 음식을 더 먹고 싶진 않았다. 다음날이 이삿날이었기에 이제 집으로 돌아가 남은 몇몇 짐을 정리하고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나는 어렵사리 다시 말을 꺼냈다.


"혹시 남은 주문 금액으로 병 와인을 구매하는 것은 어려울까요?"

"저희가 병 와인은 10만 원 이상 금액대부터 판매를 하고 있어서요. 10만 원이 넘어가도 괜찮으세요?"


와인을 좋아하기도 하고 좋은 와인은 이보다 훨씬 고가의 술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출 예정에 없던 금액 10만 원을 이때 쓰는 것은 쉽사리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길을 잃은 눈동자를 눈치챈 사장님은 다시 말문을 열였다.


"음.. 어떡하면 좋을까요? 저희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요."

"지금 술을 마시고 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5만 원 내외의 와인을 포장해 갈 수 없을까요?"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나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한 채 그리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다시 사장님께 물었다. 


"원래는 판매하고 있지 않은데, 적당한 와인이 있는지 한번 찾아볼게요. 어떤 와인으로 봐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조금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이 있을까요?"


사장님의 섬세한 배려에 멋쩍음과 고마움을 느낀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달지 않은 화이트 와인을 좋아했기에 화이트 와인을 포장해 갈 수 있을지 물었다. 사장님은 확인해 보고 오겠다며 와인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카운터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지금 그 정도 가격대의 화이트 와인은 없어서.. 샴페인으로 봐드려도 괜찮을까요?"

"아, 네네! 샴페인도 좋습니다."


사장님은 조금 후에 샴페인 한 병을 들고 나에게 돌아와 어떤 술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생산지, 품종과 빈티지, 제조법을 알려주셨는데 친절한 설명을 듣는 내내 나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진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샴페인은 스파클링 와인의 일종으로 탄산이 들어 있어 시원한 청량감이 드는 와인이다. 주로 축하주나 식전주, 파티에서 마시기 좋은 술이기 때문에 화이트 와인 다음으로 좋아하는 와인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음에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예쁘게 포장해 주신 샴페인을 들고 공간을 나왔다. 사장님은 10% DC 해드렸다고 다음에 또 방문해 달라며 웃으며 말했다. 영수증을 보니 정말 처음에 말씀해 주신 가격보다 10%를 빼고 계산해 주셨다. 나의 부주의함에서 비롯된 하나의 해프닝이었지만 고객을 대하는 사장님의 센스와 배려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사연이 담긴 샴페인을 구매한 것 같아 좋은 날에 누군가와 함께 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이사를 할 때 그 샴페인을 새 집까지 고이 들고 왔다. 그리곤 냉장고 한편에 보관해 두었다. 혼자서 술을 마시게 된 날도 있었지만 다른 와인을 따거나 맥주를 마셨다. 왠지 그 샴페인은 혼자서 먹고 싶지 않았다. 언제 누군가와 마셔야지 하는 거창한 계획은 없었지만 그냥 좀 더 두고 있으면 따고 싶은 날이 올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지난주 금요일, 드디어 샴페인을 땄다. 그날은 2년 전쯤 한 독서모임에서 만나 계속 인연을 이어온 언니가 첫 장거리 운전으로 우리 집에 놀러 온 날이었다. 서울에서 집까지는 운전으로만 4시간가량이 걸리는 거리였음에도 먼 길을 달려와준 언니에게 고마웠다. 우린 꽤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반가움과 즐거움이 공존했다. 이 지역의 토박이인 나도 처음 가보는 맛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금요일 저녁이어선지 음식점엔 사람이 가득했고 음식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그리고 우린 코스트코에 가서 과일과 빵을 샀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2차전을 준비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사연이 담긴 샴페인을 땄다. 어떻게 이 샴페인이 우리 집에 오게 되었는지 스토리도 함께 전해주었다. 첫 모금을 마셨는데 달지 않으면서도 청량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아주 좋았다. 아까 산 청포도와 젤리, 과자도 꺼냈다. 청포도와 함께 마시는 탄산이 든 포도주는 환상의 궁합이었다. 어떤 특별한 날도, 기념일도 아니었지만 딱 알맞은 때에 샴페인이 제 역할을 한 것 같았다. 그때 그 일이 잘 된 일이었다는 생각도 했다. 즐거운 날, 좋은 사람과 함께 마시는 술은 소중한 기억과 시간을 선사해주었다.


우린 새벽 2시가 다 되어갈 때까지 웃고 떠들며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는 곳과 하는 일, 만나는 사람은 다르지만 이런 점에서 진심과 마음을 나눌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르면 다른대로 이해하고, 비슷하면 비슷한 만큼 공감하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일상의 평범하고 소중한 행복을 느꼈던 날이기에 즐거운 기억으로 내 추억상자에 담길 것이다. 


시간제 예약석의 주의사항을 미처 살피지 못한 나의 부주의함에서 비롯된 선물이었다. 스토리가 담긴 샴페인이 소확행을 완성해준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모든 게 부정적인 결말로 흘러가진 않는다. 그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오히려 새로운 경험을 하고 더 긍정적인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예기치 않게 나에게로 온 샴페인을 딱 요긴하게 터뜨린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지네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 빨강머리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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