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원 Jun 25. 2024

현대인의 가면

나는 왜 가면을 쓰는 게 서툴까

많은 이들이 한 번쯤, 아니 여러 번 스스로 감정 노동자라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직장 생활에서 내외부 고객들을 대할 때 나의 본래 감정을 숨기고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다. 가령, 조금 전에 업무를 보고 간 민원인의 억지로 감정이 상했더라도 다음 민원인에게는 친절하게 응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소리를 듣는 일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럴 때마다 질타나 마음을 뭉개는 말을 듣는 것은 내 월급에 포함된 노동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기꺼이 감수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달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나 역시 인간인지라 고객을 대할 때는 가면을 쓰지만 뒤돌아서면 화가 나기도 한다. 그때마다 속으로 삭이는 감정의 에너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처럼 대부분의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더 나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현재의 힘듦, 스트레스를 감수한 채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내 안에서는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뒤죽박죽 얽혀 갈 길을 잃었는데 '피할 수 없는 일이야. 이 일은 나에게 꼭 필요하잖아'라며 최대한 정신무장을 하려고 애쓴다. 내 안에 있는 여러 개의 가면 중 하나를 골라 매일 바꿔 쓴다. 밝고 친절한 가면, 인내심이 강한 가면, 공감능력이 뛰어난 가면.. 그 종류도 여러 가지다. 이렇게 하루에도 몇 개씩 가면을 바꾸다 보면 어느 순간 나의 인격이 여러 개인지 헷갈린다.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가면을 벗은 본래의 내 모습이 아득해진다. 어디까지가 나일까.






하루에도 여러 번 가면을 바꿔 착용하는 피로함은 나만이 겪는 고통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감정 노동자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가면을 쓰는 피로함으로 고통받을 때면 '아.. 나는 정말 누군가에게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면을 바꾸어 쓰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애써 가면을 써도 그 가면 위에 기어이 침을 뱉으려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아니까.


종종 여행을 갈 때 비행기를 타면 기내에서 마치 표준화된듯한 환한 얼굴로 승객들을 맞는 승무원을 만난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저 사람의 미소는 진심일까?'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많은 순간 그러지 못했으니 말이다. 속된 말로 자본주의 미소라 불리는 것이겠거니 생각한다. 그중 소수일지라도 어떤 승무원은 승객들에게 진심을 담은 미소를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내 멋대로 이미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저런 웃음을 짓기 위해 얼마나 힘들까'라고. 그들에게는 수많은 유형의 고객들에게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무거운 의무감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직장 밖을 생각해 보자. 가족과 친구를 대할 때나 취미활동 같은 친목 모임에서는 가면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까운 사람, 업무적으로 연관이 없는 사람을 대할 때도 가면을 쓰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면을 쓴다'라는 건 진심과 달리 거짓으로 사람을 대하고 꾸며진 말과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의 '가면'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상대방의 상황과 성격을 고려하여 적절한 말과 행동,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다. 나의 섣부른 말이나 태도로 혹여나 그들이 마음을 다치거나 기분이 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예의를 갖추고 배려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참 공감되는 이야기다. 매번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살피고 스스로를 검열하는 일은 어쩌면 조금은 피로하고 매우 이상적인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진실된 마음'과 '배려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분명 그들에게 전달될 것임은 분명하다. 마음과 마음은 통한다고 믿는다. 오래도록 이러한 마음으로 관계를 쌓아간다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어치를 가진 신뢰가 생기지 않을까. 그렇게 단단해진 신뢰는 삶에서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가면을 쓰는 일에 몹시도 서툰 사람이었다. 예전보단 좋아졌지만 여전히 지금도 그렇다. 천성이 가면을 쓰거나 무언가를 거짓으로 꾸미고 부풀려 포장하는 일을 잘하지 못했다. 그러면 왜인지 마음이 편치 않고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적재적소에 알맞은 가면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주변 동료들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출근할 때마다 '자아를 갈아 끼우는 일'을 연습했고 업무를 할 때면 '본래의 나'가 아닌 '일하는 나'로 지내는 데 조금씩 익숙해졌다. 물론 처음엔 잘 되지 않았다. '일하는 나'가 나와야 하는데 자꾸만 '본래의 나'가 튀어나오려 해서 무수히 많은 순간에 애를 먹었다.


게다가 부작용도 동시에 발생했다. 여러 가면을 쓰고 내 생각을 소신껏 내뱉는 걸 자제하다 보니 너무 오래 참고 나면 속이 메스껍거나 어지러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일시적인 해결책을 찾는 데 급급했다. 퇴근길 편의점에서 4캔에 만원 하는 맥주를 자주 사들고 갔고 어떤 휴일은 하루종일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업무가 한창 바쁜 시기에는 사무실에 있는 내내 표정 변화 없이 일에만 몰두했다. 마치 가면을 쓰고 일하는 기계가 된 것만 같았다. 이때의 나는 주변 사람들이 봤을 때도 어딘가 어색해 보였는지 지나가던 한 선배가 나에게 로봇 같다며 놀리곤 했다. 그 선배는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스스로도 가끔 로봇 같을 때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저 농담으로만 넘겨지진 않았다. 정곡을 찔린 느낌이 드는 것이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하루아침에 유연한 태도를 취하기란 역시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불가능해 보일 것만 같은 일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고 나도 그럭저럭 멀쩡한(해보이는) 직장인이 되어갔다.






한편 나의 주변 사람들이나 일회성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는 '가면을 쓰는 게 서툴다'라는 핑계로 나도 모르게 날 것의 모습을 휘리릭 보여준 것 같을 때가 있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부족한 배려와 무심함을 솔직함이라는 포장지로 애써 감싸고 스스로 합리화하곤 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언제쯤 나는 내게 가장 어울리는, 또 상대방이 편안함을 느끼는 가면을 적절하게 쓸 수 있을까. 아무리 가까운 사람을 대하더라도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보이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면 가면을 쓴다는 건 거짓된 자신을 내보이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태도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다 저렇다 해도 사람은 내가 '나'로 온전히 존재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원하지 않는 가면을 쓰거나 하고 싶은 말을 꾸역꾸역 삼킬 때마다 불행을 느낀다. 너무 오랫동안 가면을 쓰다가는 진짜 '나'를 잃어버리면 어쩌나 두려워질지도 모른다. 자신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나의 내면을 진솔하게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보듬어주는 식으로 말이다.


가면을 잘 쓰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 필요한 일이자 현대인의 필수 아이템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이들과 유연하게 소통하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지 상대방이 나를 배려한 가면을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가면을 바꿔 써야 하는 상황은 생기고 나 역시 방심하다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상대방을 조금 더 배려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 후 말하고 행동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나의 작은 노력으로 누군가에게 바위만 한 크기가 될 수도 있었을 고통이 따뜻한 바람으로 가 닿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출근길 행렬을 바라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