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해외 기러기 생활 1년 반 만에 내 몸은 완전 망가졌다. 막판 2개월은 거의 요양하다시피 지내다 왔다. 한국에 돌아와 가족들과 지내니 좋았다. 약간 서먹했던 쌍둥이들과도 점점 친해졌다. 내 몸도 서서히 회복되었다. 문제는 회사 업무였다. 말도 안 되는 업무량으로 진짜 죽을 것 같았다.
48시간을 한숨도 못 자고 일하고 새벽 1시 비행기를 타고 해외출장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역시 쉽지 않은 회사였다. 그래도 알아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폐렴이나 피부병 같은 이상한 병에 걸리진 않았지만 매일매일 어깨와 목 위로 피가 통하지 않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아내가 임신을 했다. 셋째라고 해야 하나 넷째라고 해야 하나? 우리 가족에게 감사하게 또 한 명의 가족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반드시 잘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에 우리 팀에서는 회사에서 그해 가장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손이 모자라 다들 야근에 주말 출근을 하고 다른 팀에서 보조 인력까지 차출해서 행사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정말 중요한 행사였다. 내 담당 업무는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도 투입되었다. 내 고유 업무까지 하면서 도와야 했다.
어쩌다 보니 그 행사에서 내가 엄청 중요한 임무까지 맡게 되었다. 다들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업무였다. 나도 없는 회의 시간에 내가 담당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내가 적임자라고 했다. 그런 것은 크게 상관없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게 나중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때까지는 몰랐다.
워낙 크고 중요한 행사이다 보니 다들 퇴근을 못했다. 나도 종종 남아서 도왔다. 다들 힘든 시기를 꾸역꾸역 버티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행사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또 하혈을 한다고 한다. 임신 5주가 막 지났을 때였다.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왜! 또!!!
일단 팀장님께만 사정을 이야기하고 휴가를 쓰고 아내를 얼른 산부인과에 데려갔다. 의사 선생님은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이니 누워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다. 일주일 정도 휴가를 내고 아내와 쌍둥이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휴가를 쓰지 못했다. 도저히 행사 준비에서 나를 빼줄 상황이 아니었다. 회사는 행사 준비로 너무 바쁘고 나도 중요한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내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양가 부모님은 물론 주변에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 아무도 안 계셨다.
내가 계속 출근해야 하니 아내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움직여야 했다. 쌍둥이들의 어린이집 등·하원을 시켜야 했고, 쌍둥이들 목욕을 시키고 밥을 준비해야 했다. 회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정말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뱃속의 아이를 위태롭게 지키고 있는 아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정을 취해도 모자랄 판에 아내는 계속 몸을 움직여야 했다.
이 사실을 팀장님께만 알렸다. 팀원들은 몰랐다. 눈치는 보이지만 나는 일찍 퇴근을 해야 했나다. 얼른 가서 아내가 안정을 취하게 해야 했으니까. 하루는 퇴근하는데 한 동료가 나를 원망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우리는 이렇게 개고생하는데 너는 뭔데 지금 퇴근하냐? 너는 노냐?
동료의 마음은 이랬을 거다. 이해는 되었다. 미안했다. 그렇지만 나는 집에 꼭 가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다. 지금 나한테는 행사고 나발이고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켜야 하는 생명이 있었다. 이번에는 잃고 싶지 않았다. 지금 퇴근하는 것도 나한테는 너무 늦었다.
아내는 일주일 내내 하혈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나도 회사에 휴가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내는 계속 움직였다. 행사 준비는 정말 힘들었다. 드디어 출장 가기 전날 밤이 되었다. 아내가 새벽 내내 울었다. 느낌이 이상하다고 한다. 날이 밝자마자 아내와 함께 산부인과에 갔다.
유산입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내는 펑펑 울었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눈물을 참았다. 나까지 같이 울면 둘 다 무너질 것 같았다. 수술 날짜를 잡고 산부인과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쌍둥이들에게 엄마 뱃속의 동생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하며 아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상황에 나는 출장을 가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출장 가는 KTX 안에서 내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회사 일이 뭐가 중요한대!
그깟 행사가 뭐가 중요한대!
내 가족의 생명이 위험한데
회사 때문에 가족을 지키러 갈 수도 없는가!
못났다! 나라는 인간!
지금 KTX를 타고 행사를 준비하러 가야 하는 이 상황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내가 뱃속의 아이를 두 번이나 잃는 상황에서 내가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회사 일만 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노예처럼 회사가 시키는 대로 일만 해야 했다. 내 시간을 내가 통제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아내가 유산한 당일이었다. 위로하고 돌봐줘도 모자랄 판에! 나는 출장을 가야 했다.
정말 싫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결심했다.
내 소중한 가족을 지키려면 내 시간을 내가 통제해야겠다.
시간적 자유를 가져야겠다!
그러려면 경제적 자유가 필요하다!
해외에서 유산, 한국에서 또 유산. 두 번 모두 나는 아내와 뱃속의 아이 곁을 지키지 못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가슴이 아프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그때부터 나는 더 독해졌다. 독해져야 했다. 절실해졌다. 내 가족, 특히 아내에게 반드시 보답해 줄 거다. 나 같은 남편 만나서 고생한 거 꼭 보상받게 해줄 거다.
세상 어떤 것보다 두려운 건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보다 두려운 것은 없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어떤 장애물이 내 앞을 막아서도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잠 그까짓 거 한두 시간 덜 자도 된다. 쌍둥이 키울 때 1년 넘게 2시간 이상 안 자도 안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