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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둥빠 Feb 06. 2021

외로운 싱글 라이프

몸이 망가지다

아내가 A국에서 셋째를 유산하는 과정은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짐도 캐리어에 대충 때려 넣고 바로 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왔다.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산부인과로 갔다. 


한국 병원은 정말 친절하고 시스템도 잘 되어 있더라. 의사는 역시나 유산이라고 한다. 다만,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약을 좀 먹고 지켜보자고 했다. 다행이었다.     


내가 받은 휴가 기간은 딱 1주일. 다행히 일본 발령이 종료된 장인 장모님께서는 인천의 작은 빌라를 얻어서 살고 계셨다. 처가에 아내와 쌍둥이들을 데려다 놓고 조금 정리하니 나는 A 국으로 돌아가야 할 날짜가 되었다. 정말 돌아가기 싫었다. 내 아내는 아직 유산한 직후라 몸을 회복해야 하는데 나는 해외에 돈을 벌러 가야 했다.

     

휴가 같지도 않은 짧은 휴가가 끝나고 나는 혼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타기 싫은 비행기는 처음이었다. 공항은 대부분 즐거운 마음으로 갔는데 이번 비행은 지옥행같이 느껴졌다. 


A국에 도착해서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아내와 쌍둥이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8시간 만에 짐을 싸서 도망치듯 한국으로 갔기 때문에 쌍둥이들이 놀던 흔적도 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도대체 이 나라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가족, 내 셋째가 그렇게 되는데
돌보지도 못하는가.
직장이 가족보다 소중한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텅 빈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정말 싫었지만 돈을 벌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버티면서 하루하루 살았다. 한동안은 집에 들어갈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내와 상의해서 딱 1년만 더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회사에 사정을 말하면 한국으로 보내 줄 것 같았다. 


그렇게 1년 동안 혼자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쌍둥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이제 막 두 돌이 지나서 말도 조금 사람답게 하기 시작하고 예쁜 짓을 많이 할 때였는데 나는 하나도 볼 수 없었다.


1년 정도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회사에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안 된다고 한다. 차마 밝힐 수 없는 뒷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나는 한국 본사로 들여보내 줄 수 없다고 했다. 1년 동안이나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다.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을 겪으며 생이별하게 된 것이었다. 사정을 이야기했다. 회사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더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결국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6개월을 더 있어야 했다.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다. 아내는 내 결정을 따르겠다고 했다. 사실 내 결정은 아니었다. 내가 무조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회사에 고집을 부리면 분위기가 정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더 있기로 한 거다. 


그 6개월은 정말 지루했다. 몸도 점점 망가져 갔다. 4개월이 지나는 시점에 드디어 한국 본사로의 복귀 발령을 받았다. 이제 2달 동안 잘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됐다.


어느 날 몸이 좀 갑자기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숨 쉴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가슴 통증이 너무 심해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었다. 머리도 깨질 듯이 아프고 어지러웠다. 토할 것 같았다. 50도가 넘는 A국의 한여름이었는데 오한이 나서 추워 죽을 것 같았다. 덜덜 떨었다.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다. 


밤새 한숨도 못 잤다. 이러다 죽는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큰 병에 걸린 것이 확실했다. 살면서 그렇게 아픈 적은 처음이었다. 교통사고로 어깨를 다쳤을 때보다, 어깨를 수술했을 때보다, 축구하다 허리를 다쳤을 때보다 천 배, 만 배는 아팠다.

출처 : Unsplash

아내와 쌍둥이들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나는 진짜 죽는 줄 알았다. 그런 고통은 처음 느껴봤으니까. 무서웠다. 날이 밝았다. 회사 직원 차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휠체어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검사를 했다. 응급실 의사는 내 검사 결과를 계속 보면서 계속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했다. 확신이 안 드는 눈치였다. 어디다가 계속 전화를 했다. 불안했다. 본인도 잘 모르니 전문의한테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병이길래 저러는 거지?
설마 무슨 불치병에 걸렸다거나
죽는 병은 아니겠지?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드디어 나한테 왔다.     


뉴모니아


‘뭐라는 거야? 뉴모니아가 뭐야? 암모니아도 아니고...’  

   

“What? 뭔 모니아???”      

의사에게 물었다.     


pneumonia


폐렴이라고 한다. 의사가 구글 번역기에서 찾아서 보여줬다. 어이가 없었다. 무슨 폐렴에 걸리다니! 근데 농담이 아니고 폐렴에 걸리면 죽을 듯이 아프다. 운동하면서 많이 다쳐봐서 웬만한 통증은 잘 참는 편인데 폐렴이 평생 겪은 고통 중에 제일 아팠다. 죽는 줄 알았다.

     

링거를 2대 맞고 나니 오한도 사라지고 두통과 구토 증세도 좀 가라앉았다. 가슴 통증은 계속 있었지만 그래도 숨은 좀 쉬어졌다. 다행히 죽는 병은 아닌 것 같았다. 의사는 약을 꾸준히 먹으면서 4주 간격으로 체크하자고 했다. 해외 생활 막판에 폐렴까지 걸렸다. (코로나 19는 아니다.)     


끝이 아니다. 폐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약을 먹기 시작한 지 3일 정도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가렵기 시작했다. 아직 폐렴도 안 나아서 고통스러운데 갑자기 온몸에 도톨도톨한 것들이 생겨나고 가려워서 또 잠을 못 자기 시작했다. 


정말 가지가지했다. 내 몸이지만 정말 짜증났다. 또 병원에 갔다. 의사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냥 바르는 약과 먹는 약을 처방해 줬다. 바르는 약은 바를 때는 시원한 것 같은데 큰 차도는 없었다. 약을 먹고 바르며 피부병인지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 병의 치료도 병행했다.


내 몸의 면역체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폐렴에 피부병에 난리도 아니었다. 해외에서 혼자 1년 반 정도 지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몸이 망가진 것이다. 피부병은 막 아픈 건 아니지만 정말 사람을 짜증나게 했다. 계속 가려우니까. 3~4주 치료하니 피부병은 조금 가라앉았다.


4주가 지나고 폐렴 검진도 다시 받으러 갔다.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아직도 폐에 염증은 남아 있다고 한다. 또 4주 뒤에 오라고 했다. 그렇게 A국 생활의 마지막 2달은 병 치료만 하다가 끝났다. 


가족과 2년, 혼자 1년 6개월, 총 3년 6개월을 버티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을 경험하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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